고군분투하던 나의 지하철
말 그대로 푹푹 찌는 날씨가 연일 이어지던 날이었다.
밤에도 28도를 웃도는 날씨에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던 어느 날, 중고차를 보러 남편이 아는 분 매장으로 가기로 했다. 난 남편을 만나러 남편회사 근처로 가야 했고 지하철에 탑승해 땀으로 범벅인 얼굴을 에어컨 바람으로 말리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던 때, 나의 옆에 서서 나와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는 직장인을 보았다.
그 둘은 딱 보기에도 과장님과 사원 혹은 대리 같았다. 과장과 함께 외근을 함께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과장으로 보이는 분은 전화통화를 하느라 바빴고 옆의 사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빳빳한 셔츠에 반듯한 차림이었지만 얼굴과 목에 땀을 뚝뚝 흘리며 초점을 잃은 표정이었다. 과장님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멍 때 리던 그 사원을 보고 나는 나의 인턴생활을 문득 떠올렸다.
나는 더운 여름에 입사해 6개월을 인턴으로 보내고 추운 겨울에 퇴사했다. 종합광고대행사였는데 직업 특성상 녹음실과 스튜디오가 거의 강남에 있어 차장님과 지하철을 자주 탔다. 우리 회사는 강북에 있어서 항상 먼길을 지하철로 다녔는데 차장님은 재밌고 활발한 스타일이어서 같이 지하철로 이동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한 번은 강남역에 한창 '강남스타일'로 뜬 싸이가 와서 일하러 갔다가 사람에 깔려 죽을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마저 즐기며 싸이 좀 보고 가면 안되냐던 뭐 그런 유쾌한 차장님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금요일에 울리는 메일 알림은 전쟁이 났다는 소식보다 소름 끼치는 존재다. 그날도 금요일 오후 5시 즈음에 다음 주 월요일까지 시안 준비하라는 폭탄 메일을 날리고 퇴근하는 광고주 느님의 요청이 왔고 우리는 힘 빠진 좀비처럼 주말을 반납하고 디자인팀과 시안을 준비했다. 그리고 봉투에 잘 담아 신줏단지 모시듯 안고 지하철로 이동을 했다. 시안 피티 후 차장님이 수많은 독설을 온몸으로 받던 날,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복귀하는 모습은 너무 안쓰러웠다고 해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란 신입이었던 나는 결혼도 안 한 노총각의 뒷모습에서 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을 떠올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자동차나 택시를 타고 움직였다면 덜했을까?
국장님과는 일산을 다녔던 기억이 있다. 건설회사 광고 준비를 위해 하는 현장답사였다. 현장 주변 부동산을 다니고 입지를 살폈다. 다른 광고전단지들의 카피를 살폈고 역시 회사로 복귀하는 수단은 지하철이었다(이상하게 차로 출퇴근하던 분이 없었다). 국장님과 함께 타는 지하철은 혼자 타거나 친구랑 타던 지하철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모든 얘기가 업무의 연장이었고 무거웠다. 그렇게 상사와 타는 지하철은 편히 앉아 쉴 수 없었지만 나름 알찬 시간이었다.
나는 지하철을 좋아한다. 어디든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는 점이 좋다. 스물넷 나의 인턴 시절에 차장님, 국장님과 함께 타던 지하철은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왠지 드라마 '미생'을 떠올리게 된다.
왜일까?
차장, 국장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환상 속에 있던 종합광고대행사의 민낯을 보고 그들의 자리가 쉬운 자리가 아님을 알게 되어서?
뭐라 딱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지하철, 그 안에는
사회에 이제 막 발을 디딘 어느 인턴의 아침잠과 저녁잠을 받아주고
슬픈 노래 들으며 울 수 있던 곳이기도 하고
나에게도 영화 같은 만남이 생길까 새끼손톱만큼 기대했던
그 인턴 시절이 모두 녹아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 나라 수많은 가장들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어
그 시절 차장님과 국장님을 감히 안쓰러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