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 대장 내시경을 받았다. 내 돈으로 한 건 아니고 회사에서 해주는 건강검진이다. 결국 이것도 내 돈인가? 여하튼 덕분에 잊고 살았던 회사에 대한 감사함을 오랜만에 느꼈다.
대장 내시경 검사는 의외로 인기가 많았다. 회사에서도 사람이 많아 예약하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 검사를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서너 달 전부터는 신청해야만 했다. 이렇게 힘든 검사를 예약했건만 대장내시경을 받는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의아해했다. 아내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다들 “벌써? 너무 젊지 않아?”란 반응이었다.
처음 받는 거라 잘 몰랐는데 대장 내시경은 보통 빨라도 삼십 대 중후반부터 받는단다.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나는 남들이 굳이 왜 받느냐는 반응을 보자 더욱더 받고 싶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관종인가 보다.
내가 받을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스크롤을 넘기던 도중 한 의사 인터뷰를 발견했다. 내용인 즉 요즘 서구화된 식습관 때문에 장 건강이 일찍부터 위협받으므로 삼십 대도 받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나이스!” 이제 떳떳하게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생겼다. 세상 모든 건 명분 싸움이다.
이래나 저래나 결론적으론 받기를 잘했다.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대장에서 용종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크기가 크진 않아 검사 도중 절제했다. 십만 원이란 거금이 나갔지만 나중에 이것 때문에 들어갈 돈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냈다. 사람들이 악착같이 돈 벌어 다 병원비로 들어간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고 의사가 왜 많은 돈은 버는지 알겠다.
하지만 이런 결과와 별개로 대장 내시경을 받는다고 했을 때 사람들 반응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확실히 깨달았다. 수술실에 들어가 검사를 하는 순간은 괜찮았다. 사실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그런 걸 느낄 새가 없다. 입으로 마취가 꽂히는 순간 기억을 잃어버리고 침대에 누워 침 흘리고 있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술실을 들어가기 전까지다. 이 과정이 험난했다. 대장 내시경을 하려면 장을 깨끗하게 비워야 한다. 이런 과정을 위해서 병원에서는 나눠주는 가이드라인이 있다. 긴 요약문을 줄여보면 전날 아침과 점심은 가볍게 미음이나 흰 죽을 먹고 점심 두 시 이후부터는 금식이다. 그리고 저녁 여섯 시에 설사하게 만드는 포를 한 봉 타서 먹고 새벽 네 시쯤에 일어나 다시 그 포를 하나 더 먹는다.
뭔가를 이렇게 먹지 않아 보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예전에 장염에 걸렸을 때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포카리스웨트만 먹었는데 그때가 떠올랐다. 뭔가를 먹지 못하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노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기력이 없으니 아무것도 못하나 보다. 먹는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새삼 느꼈다.
다음 날 검진이라서 회사에 출근했는데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점심은 본죽에서 흰 죽을 포장 해왔다. 사무실에 앉아 흰 죽만 먹으니 맛이 더럽게 없다. 몇 숟가락 뜨다가 다시 뚜껑을 닫았다. 이렇게 배고픈데도 맛이 없다니 흰 죽은 진짜 맛없나 보다. 간장을 안 넣어서 그런가.
평소에 가볍게 하는 일도 기운이 없으니 힘에 버거웠다. 그래도 회사에서 쓰러질 순 없으니 이온음료만 줄곧 마셔댔다. 옆을 보니 벌써 쌓인 파란 파워에이드 캔만 세 개째다. 그렇게 배를 굶주린 상태로 퇴근해 집으로 갔다. 이렇게 먹은 게 일도 없는데 배에서 나올 깨있을까 싶었다.
가는 길에 집에서 먹으려고 포카리스웨트 큰 통을 샀다. 집에 가서 병원에서 택배로 온 대장 내시경 세트를 뜯었다. 뜯으니 거기에는 가루가 들어있는 포 2개와 장 내 가스 제거제 500mL 물통이 있었다.
설명을 읽어보니 물통에 가루를 넣고 먹으라고 한다. 이온음료를 넣어도 된다고 해서 물통에 포를 넣고 포카리스웨트를 넣어서 먹었다. 역한 느낌이 들어서 원 샷은 못했고 천천히 나눠 마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 번에 먹을 걸 그랬다. 몇 번 먹으니 더 역한 느낌이다.
한 삼십 분 있으니 배에서 신호가 왔다. 아침부터 먹은 게 없어 뭐 나올 게 있나 싶었는데 그래도 뭔가가 나오긴 하더라. 그래서 물을 한참 뺐다. 화장실을 열 번도 넘게 다녀온 것 같다. 그렇게 진 빠지면서 저녁을 보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또다시 한포를 뜯고 먹었다. 또 화장실을 갔다. 반복이었다.
대장 내시경을 받는다고 했을 때 팀장님이 하얀 물이 나올 때까지 싼다고 했을 때 오버한다며 웃어넘겼는데,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병원에서는 노란 물 나올 때까지 하셨냐고 묻긴 하더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제는 물도 먹지 말아야 해서 쫄쫄 히 미라처럼 마른 채로 병원으로 갔다.
걸어가면 너무 힘들 것 같았는데 다행히 아내가 태워준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으로 타고 왔다. 이렇게 힘든 몸일 때 잘해주니 뭔가 기억에 더 남는다. 아내의 전략일까.
시간은 흘러 일반 건강 검진을 모두 마치고 대장내시경까지 맞췄다. 허무하게도 마취 마스크를 쓰자마자 잠에 들어 정신을 차리고 나니 침 흘리며 옆을 보고 있었다.
간호사가 “벌써 한 시간이나 누워계셨어요”란 말이 들린다. 더 자고 싶었는데 너무 추웠다. 일부로 이렇게 춥게 하는 듯하다. 적당한 온도면 사람들이 잠을 자니깐 이렇게 춥게 만들어서 나가게끔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중에 나처럼 추워하는 과장님이 자기는 수면양말을 가져가서 신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시경 할 때 추우셨던 분들은 이 팁을 활용해 보시라.
이렇게 대장 내시경을 마치고 너무나 오래 참았던 탓일까 BHC 치킨을 시켜서 와구와구 먹었다. 검사를 끝냈으니 가벼운 음식을 먹어야 했는데, 인내심에 한계가 온 탓이다. 이렇게 내 첫 대장 내시경은 끝났다. 사람들이 힘들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은 검사였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금식으로 시작해 치킨으로 끝났다.
회사를 다니는 사 년 동안 받은 건강검진 중 가장 기운이 없는 상태로 받았던 것 같다. 이런 걸 사십오십 대 차부장님들은 어떻게 받는지 모르겠다. 이런 의문을 품고 회사에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니 내가 좀 힘들게 한 거였더라. 어떤 사람은 저녁도 먹었단다. 그래도 이런 기억 때문인지 앞으로 몇 년간은 대장내시경은 안 할 것 같다.
※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직위들은 작가에 의하여 모두 임의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림 출처 : Ai Copi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