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바뀌자, 길이 보였다.
군휴학을 마치고 복학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던 어느 해, 나는 강원도의 작은 절 보적사에 머물게 되었다. 집에만 있긴 아쉬웠고, 마침 작은누나가 평소 자주 찾아뵙던 분이 보적사의 주지스님이셨다. 서울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처음엔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바쁜 도심을 떠나 자연 속에서 조용히 머무는 시간은 그동안 미뤄두었던 생각들과 마주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보적사는 이름만큼이나 조용한 절이었다. 아침마다 산 안개가 천천히 걷히는 모습을 보며, 세상의 속도가 잠시 느려진 듯한 나날을 보냈다. 새벽 예불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고, 낙엽 밟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한 숲길을 산책했다. 부엌에서 공양주 보살님이 밥 짓는 냄새, 먼 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나무에 떨어져 내리는 햇빛까지도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고, 아무것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내가 묵던 방의 벽 한쪽에 걸린 작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빛바랜 종이에 단정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불교에서 수행 중 나타나는 열 가지 장애를 이겨내는 방법을 서술한 보왕삼매론의 한 문장이었다.
念身不求無病 身無病則貪欲易生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하셨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 문장은 마치 오래전부터 내 속을 꿰뚫어 보던 이가 건네는 말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좌골신경통을 앓아왔다. 이 병은 대학교 때 엉덩이 통증으로 시작되었다. 아마도 다섯 시간 넘게 버스를 타며 잘못된 자세로 앉아가던 습관이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엔 단순한 근육통이겠거니 했다. 며칠이면 낫겠지 했다. 그런데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점점 더 뿌리를 내렸다.
병은 생각보다 집요했다. 나중 되니 잠시만 앉아 있어도 다리가 저리고 허리 아래로 방사통이 흘러내렸다. 청바지처럼 몸에 붙는 옷은 입을 수 없었고, 사람을 만나도 오래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고역이었다. 옷을 좋아하고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했던 나에게 그것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서는 상실이었다.
대학병원, 유명하다는 한의원.. 전국을 전전했지만 차도는 없었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 생각이 마음 깊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떤 날은 희망에 부풀었고 어떤 날은 체념했다. 점점 스스로를 피곤한 사람,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 비문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린 이 짧은 문장이, 그 오랜 무게를 조금 덜어주었다.
나는 늘 병과 싸워 이겨 건강한 원 상태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병은 내 인생을 갉아먹는 적이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병마저 나를 이롭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떻게 병이 약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문장을 곱씹을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틈이 생겼다. 꼭 병을 이겨내야만 하는 걸까. 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도 있는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래 앉을 수 없었기에 더 많이 걸었고, 덕분에 얻게 된 건강상의 이점도 있었다. 세상 곳곳을 걸으며 다양한 풍경들을 보고,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술자리에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자연스레 술도 줄었다. 술을 안 마신다는 이유로 빠진 모임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관계로 이어진 인연도 생겼다. 누군가는 정신병원에 들어가서도 술을 끊지 못하는데, 나는 이 병 덕분에 술을 즐기지 않는 습관을 갖게 됐다. 병이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 변화였다.
아플수록 더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사람들의 표정, 나를 배려하던 말투, 누군가의 걱정 어린 손길이 이제는 선명히 느껴진다. 고통이 나를 사람답게 만들었다는 생각도 든다. 조용히 아파 본 사람만이 다른 이의 고통에 다가갈 수 있다. 병은 내게 불편함만 준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눈도 함께 바꾸어놓았다.
그날 이후, 나는 병을 '적'이 아니라 '동반자'로 보기 시작했다. 병이 있는 지금도 나는 살아 있고, 병 덕분에 나를 이해하고 세상을 돌아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동행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아무리 나빠 보이는 일도, 그것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 위에서, 기왕이면 웃으며 걸어가고 싶다. 병이든 고난이든, 그 모든 것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주는 길동무라면... 나는 오늘도 그들과 함께 천천히 걸어가려 한다. 빠르지 않아도 좋다. 내 발로, 나의 속도로 한 걸음 한 걸음.
때로는 멈춰 서서 숨을 고르기도 하고, 고통에 주저앉아 하늘만 오래 바라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도 길은 계속 이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은 훨씬 앞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고, 나는 자꾸만 뒤처지는 것 같지만, 문득 뒤돌아보면 나도 먼 길을 걸어왔다는 걸 알게 된다.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조차 내 안에 퇴적되어 단단한 층을 이루고,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는 뿌리가 되어 있었다.
병은 여전히 내 곁에 있다. 완전히 낫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고통을 밀어내지 않고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때로는 그것이 삶을 더 깊이 있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결국 우리를 더 온전한 존재로 만들어가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림출처 : chat gpt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