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은 가장 강한 무기다.
침착맨을 꽤 오래 봐왔다. 대학교 때부터 어느덧 7년 가까이 된다. 시작은 '침펄토론'이었다. 침착맨 본인도 이 콘텐츠를 기점으로 팬이 급격하게 늘었다고 말했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사자 VS 호랑이, 딱딱 복숭아 VS 물렁 복숭아"처럼 유치하게 들릴 수 있는 주제를 두고 그들은 진지하게 토론을 펼쳤다.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설득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종종 허리를 꺾고 꺽꺽대며 웃었다.
그들의 말다툼은 단순한 예능이 아니었다. 외로웠던 대학교 기숙사 생활에 침착맨과 주호민은 내 고독한 저녁을 함께해 준 친구였다.
그 후로 7년이 지났고, 침착맨은 더 크고 넓어졌다. 300만 구독자를 달성했고, 유퀴즈에도 출연했고 넷플릭스와 협업도 진행 중이다. 한국 유튜브계의 1 황이라는 평가를 듣고 '한국인이라면 침착맨은 알아야 한다'는 밈까지 돌 정도다. 콘텐츠의 스케일도 커졌다. 그중 하나가 최근 시작한 '침착맨의 둥지'다. 침착맨이 사회를 보고, 공통된 주제를 두고 초대된 게스트들과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평소 라이브방송을 주로 하는 침착맨이지만 이 콘텐츠는 녹화방송이다. 라이브는 부담스럽지만 유튜브에 나오고 싶은 이들을 위한 포맷이다. 나는 이 콘텐츠는 즐겨보지는 않았는데, 너무 갖춰진 느낌 때문이었다. 이전이 자취방에서 친구들과 생각 없이 수다 떠는 분위기였다면, 이건 양복을 입고 결혼식장에서 만나는 느낌이었다. 침착맨 특유의 마이너 한 감성과 조합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조금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염따 편을 보고 이 콘텐츠를 좋아하게 됐다. 염따는 래퍼이자 'FLEX'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인플루언서다. 침착맨 유튜브에 처음 나온 게스트는 아니었다. 예전 출연 당시에는 구찌의 천만 원짜리 의자를 침착맨에게 사게 하고, 주호민에게도 명품을 사게 하며 큰 화제를 모은 바 있었다. 평소 잘 휘둘리지 않는 그들이 염따 앞에서 당황하고 감화되어 구찌매장에 가서 천만 원짜리 의자를 사게 되는 과정은 도파민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번 대담도 가볍고 유쾌하게 흘러가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웬걸. 예상과 달리 담백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쿼터파운드 치즈버거를 주문했는데, 깊은 곰탕 한 그릇이 나온 격이다. 그러면서도 분위기가 너무 지나치게 진지하진 않았다. 침착맨의 유머와 염따의 리액션이 적절히 섞이면서, 유익함과 재미를 동시에 잡은 콘텐츠가 되었다.
염따는 오랜 무명 시절을 겪었다. 2006년부터 활동했지만, 201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무려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둠 속을 걸은 셈이다. 그는 말한다. 자신 같은 광대에게 무서운 것은 나쁜 관심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그래서 그는 유명해지기로 결심했다. 음악을 알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알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그는 다양한 기행을 벌였다. 인스타 라이브에서 도지코인을 1억 원어치 사고, 3천만 원이 떨어지자 욕을 내뱉으며 또 1억을 샀다. 해외선물에 40배 레버리지를 걸어 1억 원을 넣고, 아침에 200만 원만 남긴 일도 있다. 티셔츠를 팔아 하루에 4억 원을 벌기도 했고, 합정에 '데이토나 레코즈'라는 카페를 열었다가 6억 원을 손해 보기도 했다.
이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돈을 쓰는 그의 모습에서 '플렉스'라는 문화가 탄생했다. 누구나 영화 속 장면처럼 돈을 뿌리는 상상을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염따는 그것을 실제로 보여줬고, 대중은 열광했다. 그 역시 그런 반응을 즐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음악을 알리기 위해 벌였던 행동들이 이제는 목적이 아닌 수단처럼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강남구청 사거리에서 'FLEX 아기용품점'이라는 간판을 보았을 때, 그는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FLEX'가 유행을 넘어, 너무 익숙해진 단어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는 고민 끝에 자문한다. "계속해서 황당한 이벤트로 이슈를 만들며 인기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고 훌륭한 앨범을 남기고 싶다고.
그 이후로 염따는 인스타그램을 2년간 닫았고, 술과 담배, 클럽 등 방탕한 생활을 끊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자전거를 타며 음악을 들으며 자신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돌아본 그는, 자신이 돈에 큰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필요했던 것은 자전거와 그것을 탈 수 있는 몸, 음악을 만들고 들을 수 있는 기기정도였다는 것이다.
영상에서 그가 가장 행복했던 두 순간을 들려준다. 하나는 첫 번째 앨범을 내고, 판교에 있는 친한 형의 회사로 CD를 전해주러 갔을 때다.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 그 형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 앨범을 듣고 처음으로 네가 뮤지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 말이 염따는 눈물이 났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첫 앨범을 낸 날,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블로그에 어떤 이가 남긴 긍정적인 앨범 후기를 읽고, 5호선 열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저 자신의 음악이 좋았다는 말 한마디에, 그는 울 수 있었다. 이 얘기를 듣기까지 그는 15년이 걸렸다.
영상이 끝난 뒤에도 염따의 진솔함에 여운이 오래 남았다.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그 여운의 일부다. 염따는 자신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끊임없이 묻는다고 했다. "너 지금 이거 하면서 행복하니?" 대답이 OK가 나오지 않으면 다른 행동을 하고 또 묻는다. 이렇게 반복해 가며 그는 자신의 최적의 삶을 찾아간다.
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최근 주식과 금값이 올라 수익을 냈을 때 기뻤나? 그렇진 않았다. 오히려 나와 맞는 책을 읽고,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 혹은 마음에 드는 글을 써냈다고 느낄 때 나는 더 큰 만족을 느꼈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 동물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