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파열음

1화

by 이동준

학생 때는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기도 전부터 집에 간다는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곤 했다.

나이를 더해갈수록, 집에 가는 길의 배경음은 점점 단조로워지고,

이제는 '집에 가면 무엇을 하나' 같은 건조한 물음이 설렘이 있던 자리를 대신해 간다.

단순한 즐거움에 내뱉던 감탄의 언어들은 점점 입안에서 힘없이 사그라진다.

어쩌면 성숙해진다는 건, 마음속의 말들이 조금씩 가라앉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퇴근길 승강장에 선다.


열차의 문이 열리고, 만원의 좁은 틈새에 몸을 욱여넣는다.

사람들의 낮은 숨소리와 기계적인 안내 방송만이 흐르는 차내.

몇 정거장쯤 지났을까, 등 뒤로 갈색 점퍼를 입은 한 노인이 비집고 선다. 아무렇게나 뻗은 수염과 정돈되지 않은 모습에서 오랜 고립의 냄새가 훅 끼쳐온다.

그가 지나갈 수 있게 몸을 비켜주려던 찰나, 날카로운 괴성이 파열음 같이 터져 나온다.


"끄아아우! 으어어아! 아으이아아아!"


마치 아주 먼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혹은 가슴속 깊은 곳에 갇혀 있던 응어리를 한꺼번에 토해내려는 듯한 기이한 음성이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주변 사람들은 황급히 몸을 돌렸고, 멀리 있던 이들의 시선도 일제히 그에게 꽂힌다.

하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허공을 향해 정체 모를 비명을 내뱉는다.


"아아아아! 끄으아아아아!"


그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견고했던 인파 사이로 기이한 통로가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당혹감과 거부감이 섞인 눈빛으로 서둘러 길을 터주었고, 노인은 그 '침묵의 바다'를 가르며 다음 칸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저 사람 또 저러네." 옆 승객이 낮게 혼잣말을 속삭인다.


노인은 이미 다음 칸으로 사라졌지만, 등 뒤에서 터져 나오던 파열음의 잔상은 여전히 선명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가 지른 소리는 정말 단순한 소음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 누구와도 닿지 못한 외로움이 곪아 터진 언어의 잔해가 아니었을까.

너무 오랜 시간 대화하지 않아 문법과 단어를 잊어버린 노인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립의 끝에서 필사적으로 꺼내 놓은 '잊힌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노인이 잃어버린 것이 타인과 닿기 위한 '말'의 형식이라면,

내가 잃어가고 있는 것은 세상을 향한 '반응' 그 자체였다.


학생 시절, 교문을 나서기도 전 터져 나오던 콧노래는 세상이 주는 자극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던 나의 가장 생생한 언어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떤가.

경계와 피로로 무장한 채, 타인의 비명 앞에서도 그저 몸을 비키는 무채색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쓰지 않는 근육이 퇴화하듯, 내 안의 감탄과 경탄, 그리고 타인을 향한 사소한 궁금증들도 서서히 빛을 잃어간다. 소리를 지르는 노인은 차라리 필사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으나, 고요한 나는 침묵 속에서 조금씩 마모되어 가고 있다.


열차의 진동 소리만이 남은 퇴근길,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의 언어는 안녕한가. 그리고 오늘 하루를 보내며 소리 없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