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멸하는 도피처

5화

by 이동준

유독 나만 지친 것 같은 날이 있다.

온종일 세상에 치여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들어선 지하철 승강장은 소리 없는 전쟁터다.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타인들의 눈동자가 유난히 예리하다.

어디선가 일어날 채비를 하는 미세한 인기척이라도 들리면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그 틈을 파고들기 위해 눈동자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타인을 제치고서라도 앉아야만 하는 그 집요함은 실은 오늘 하루를 겨우 버텨낸 몸이 보내는 간절한 안도의 신호에 가깝다.


운 좋게 빈자리를 차지한다.

외투의 두툼한 부피 탓에 양옆 사람들과 어깨가 맞닿지만, 누구 하나 불쾌한 기색이 없다.

그저 묵묵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할 뿐이다.

내 옆에 앉은 중년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스마트폰 영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그녀의 요란한 벨 소리가 정적을 깬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가 옆자리인

내게까지 어렴풋이 전달된다.

한참을 듣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서늘한 문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네, 소송하세요. 이미 우리 직원들까지 협박하고

괴롭히셨잖아요. 고소를 하시든 마음대로 하세요."

단호한 통보와 함께 전화를 끊는다.


방금까지 일상적인 영상을 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차가운 어조다.

어둠이 내린 맞은편 창문에 그녀의 실루엣이 가만히 비친다.

의도치 않게 마주한 그 투명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머문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영상을 이어간다.

방금 치렀을 감정의 격랑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하다.

창에 비친 그 평온함이 실물보다 더 형형하게 다가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만 힘들었던 것 같은 억울함이 서서히 잦아든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전쟁터를 등 뒤에 숨긴 채 지하철에 오른다.

누군가는 법정 싸움을, 누군가는 무례한 갑질을,

또 누군가는 무너진 관계를

손가락 끝에서 휘발되는 무의미한 영상 뒤로 밀어 넣어둘 뿐이다.


퇴근길, 필사적으로 빈자리를 찾아 앉으며 폰을 드는

이유는 단순히 심심해서가 아닐 것이다.

일상의 소란에 온몸이 할퀴어진 채 돌아오는 길,

잠시라도 날 선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정을 삼키는 것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짧은 영상은

우리가 선택한 가장 무해하고도 슬픈 도피처다.

이 칸에 앉은 이들 중 온전한 마음으로 오늘을 마친 이가 얼마나 될까.

무너진 마음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눈앞의 작은 빛에

의지해 오늘의 소란을 잠재울 뿐이다.


나 또한 그들처럼 빛나는 화면 아래 고단했던

오늘을 간신히 덮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내일로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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