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것은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를 의미한다. 즉,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사회적 및 도덕적 판단에 중심이 되는 것을 우리는 정의라고 부른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에 대해서 서로 나누고 논쟁했으며, 이와 함께 가장 완벽한 정의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가 여러 가지의 정의(justice)에 대해서 정의(define)했지만 그 어떤 것도 사회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딜레마를 피할 수는 없었고 때로는 이런 회의론적인 생각에까지도 다다르곤 했다.
완벽한 정의가 존재할까?
사람이 고안해낸 정의 중에서 모든 상황에 올바르게 적용되고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정의는 발견된 적이 없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 측면에서 가장 용이하고 많은 문제 해결에 중심이 되는 정의는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지금 우리가 정말로 찾고 있는 것이고 또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즉, 완벽까지는 아니어도 완벽에 가장 가까운 정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정의를 다름 아닌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바로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점과 그 이후에 창조주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성경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자체로써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존엄성이 반드시 정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며, 이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가장 완벽에 가까운 정의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를 기반으로 한 “법치적 자유주의”라고 생각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유명한 강의로 알려진 마이클 샌델의 "Justice"라는 강연이 책으로 되어 출간되었고, 이는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의 한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과거의 철학자들이 주장한 각각의 정의를 서로 비교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대치가 된 두 사상이 바로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다. 공리주의는 간단히 말해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사상이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정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 기독교인들과 사자를 집어놓고 그것을 구경하는 수 천명의 로마인들이 쾌락을 느끼는 것을 보며, 공리주의는 이 또한 다수의 행복을 주기 때문에 정의라고 말한다.
이처럼 공리주의에서 원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때로는 소수의 사람들이 외면당하고 심지어 희생당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이러한 공리주의의 인권침해를 비판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천부인권, 즉 하늘에서 준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인권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으며, 이를 국가 또한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오토바이를 탈 때 헬멧을 의무적으로 착용하게 하는 것이나 동성애, 안락사 또는 장기거래를 금지시키는 것들에 대해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이를 국민의 행동을 제한한다고 하며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극대화를 추구하며 국가의 공동체보다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 모든 행위는 각자에게 자유롭게 허락이 되고 이 하늘이 허락한 인권을 국가가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토바이 운전자의 의무적 헬멧 착용이 드문 이유도 자유 보장 때문이 아닐까? Copyright 2019. Stuff.co.nz all rights reserved.
앞서 언급했듯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안락사, 동성애, 장기거래와 같은 것들을 법으로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지상주의의 한 가지 결점이 드러나는데 바로 비윤리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단순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지상주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한 사람이 바로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다. 칸트는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덕적 및 윤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비자연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들까지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리하자면, 남의 자유와 인권에 피해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인간 자체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이자 목적과 상황을 불문하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률- 이를 칸트는 “정언명령”이라 부른다- 이것에 위반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만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언명령을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가 나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정의라고 생각한다. 이 정언명령을 나라가 법으로 제정하고, 시민들이 이를 지키고 준수한 이후에야 국가가 그의 대가로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줘야 하는 것이며, 나는 이것을 법치적 자유주의라고 정의하고 싶다.
정언명령에는 2가지의 주요한 조건이 필요한데, 첫 번째는 보편화 가능성이다.
말 그대로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이 위반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어 살인과 도둑질과 같은 시간, 장소, 문화를 초월하여 금지된 법률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보편화된 법률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바로 인간을 단순히 수단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조건에서 칸트의 정언명령과 자유지상주의의 대치가 일어난다. 여기서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과 존재 자체만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앞서 언급했던 성경에서 강조한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칸트는 자살도 정언명령을 위반한다고 주장하는데, 자살을 함으로써 목숨을 끊는 것은 인간을 단순히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자신에게 있는 인간 존재 자체의 목적을 처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칸트는 안락사 또한 동일한 이유로 반대하고 있으며, 동성애도 인간을 단순히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성의 목적과 자연을 거스르는 범죄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칸트는 행위에 상관없이 좋은 의도와 좋은 결과가 있는 것을 정의라고 주장하는-이를 “목적론적 윤리”라고 한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할 뿐만 아니라 인권과 자유라는 명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려 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행위까지 비난하고 있으며, 이를 막을 추가적인 법률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금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이슈들을 가지고 이것이 정의로운가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낙태나 동성애와 같은 소수자의 인권, 그리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주제는 현대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평등과 자유를 줄 수 있는 대로 다 주는 것이 정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단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뿐더러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행위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정의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어떠한 자유나 평등이 인간의 본질과 가치를 더럽히고 인간을 단순히 특정 수단으로 여기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을 허락이 아니라 오히려 금지하는 것이 정의다.
나는 국가는 이런 행위를 모두가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법, 즉 정언명령을 국가의 공식적인 법으로 지정하는 것을 통해 인간이 넘어가서는 안될 울타리를 지어주고, 그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것이 바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는 어떤 모습인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깊게 내려가 보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에 다다를 때가 정말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난 후에 오직 당신만의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고 난다면 세상의 옳고 그름을 조금이나마 더 명료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주장하는 글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정의들 중 단지 하나의 예시라고 생각해주길 권면한다. 내가 앞서 이야기한 정의에도 당연히 결점이 있고, 앞서 얘기했듯이 "사회에 그나마 더 용이하고 완벽에 조금이나마 더 가깝다고 생각되는 정의"라고 생각할 뿐이지 완벽하지는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