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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Oct 24. 2020

악한 장발장, 선한 자베르

목적론과 의무론의 충돌

    이전 글에서 나는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글에서 나는 시간, 장소, 상황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지켜야 하는 법들을 정해놓고 그 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허락해주는 사회적 구조, 즉 법치적 자유주의가 바로 완벽에 가장 가까운 정의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 글의 마지막에 나는 “법치적 자유주의 또한 결점이 있고 완벽하지 못하다”라고 언급하면서 글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번에는 이 법치적 자유주의의 한계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뭐예요?”

    누군가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나에게 이런 질문이 들어온다면,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빅토로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선택할 것이다. 레 미제라블은 책의 주인공인 “장발장”의 이름을 딴 법이 있었을 정도로 전 세계에 잘 알려진 고전 명작이다. 제목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만큼 환경적, 사회적으로 힘든 시간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뿐만 아니라 이 책 한 권은 부모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 청년들의 열정, 나라를 향한 저항, 갈등, 용서와 같은 수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이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고전 명작이자 중고등학생 필독서로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론 레 미제라블이라는 하나의 작품에 정말 많은 주제들이 들어가 있는 것에서도 이 책의 가치를 많이 느끼지만, 내가 레 미제라블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한 가지의 도덕적 딜레마 때문이다.

장발장이라는 인물이 사촌들을 먹이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알 정도로 너무 유명하다. 이 19년간의 옥살이에 대해 더 깊게 들어가 보면, 감옥에서의 삶에는 죄수들을 위한 교육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혹독한 노동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장발장이 감옥에서 나오게 될 때에, 그의 손에는 노란색 통행증이 쥐어졌다. 이는 그가 흉악한 범죄자였다는 표시이며, 그가 사회 어디를 가던지 이 통행증은 그에게 범죄자라는 낙인을 심어주었다. 결국 이 통행증 때문에 장발장은 어딜 가더라도 환영받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석방된 장발장에게 남아있던 것은 분노와 증오심뿐이었다.


교도소는 어떤 곳일까? 물론 범죄에 대한 심판을 받는 곳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죄수들이 후에 사회에 나갔을 때에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서 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곳이다. 그러나 장발장이 있었던 교도소는 죄수들의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하루 종일 일만 시켰을 뿐만 아니라 죄수들이 석방을 받을 때에 노란색 통행증을 쥐어주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해왔다. 시간이 지나서 장발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여러분, 나같이 나쁜 놈이 주의(신의) 섭리를 구한다거나 사회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자격은 물론 없겠지요. 그러나 이 장발장도 전에는 그저 무지몽매한 촌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감옥이란 곳이 바보 같았던 나를 악랄하고 위험스러운 인물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 감옥이 나를 파멸시켰듯 관용이 나를 구해 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관용(용서)은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와 만난 사건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이 장발장을 거부할 때에 미리엘 주교는 그를 귀한 손님으로 여기며 집으로 초대했고, 그에게 식사와 잘 곳을 제공함과 동시에 그를 “형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후에 장발장은 양심과 죄의 본성이 서로 충돌하는 시간을 지나 결국 미리엘 주교의 귀한 은그릇을 훔쳐 달아났고, 그러다가 헌병들에게 잡혀 다시 미리엘 주교 앞에 서게 된다. 그때 주교는 장발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노형(노형은 동년배인 남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이구먼! 반갑소. 그런데 이게 웬일이오? 당신한테 촛대도 드렸는데 이건 왜 잊어버리고 가셨소? 이것도 은이니까 이백 프랑쯤은 받을 수 있을 거요.


미리엘 주교는 어떻게 보면 주교로서 해서는 안될 행동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헌병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이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거짓말을 정말 사소한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의무론적 윤리를 추구하는 임마누엘 칸트에게 거짓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정언명령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정작 과거에 장발장을 향한 법의 심판과 교도소에서의 삶이 그를 파멸시킬 동안 미리엘 주교의 범죄는 그를 사회를 향한 증오심으로부터 꺼내 주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법이 사람을 죽이고, 범죄가 사람을 살린 것이다. 이런 딜레마가 보일 때에 우리는 다시 한번 진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전 글에서 설명한 법치적 자유주의에 의하면 미리엘 주교의 행동은 정의롭지 못한 행위였다.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법들 중 하나를 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했고, 그의 의도대로 장발장의 삶이 완전히 변화됐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선한 범죄는 용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면, 의도에 상관없이 범죄란 범죄는 모두 심판하고 처벌하는 것이 정의인가?

미리엘 주교의 범죄 덕분에 장발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그의 분노와 증오심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용서와 자비로 채워졌다. 그는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몽트뢰유 쉬르 메르라는 도시에 정착해서 살아가는데, 그곳에서 한 가지 획기적인 기술을 발명해서 그 기술을 통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업적을 이룬다. 그로 인해 많은 돈을 벌게 된 마들렌은 그 도시의 시장이 되어 미리엘 주교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갔다. 뿐만 아니라 팡틴이라는 죽어가던 한 여인을 위해, 그녀의 딸 코제트를 입양해서 평생을 그 아이를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장발장의 선행들의 뒤편에 있는 어두운 면을 주목해야 한다. 마들렌 시장으로 있을 당시에 장발장은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 그의 딸 코제트에게까지도 그가 범죄자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장발장은 그의 노란색 통행증도 숨기며 살아왔고 (이는 거의 중범죄에 속한다) 한 번은 코제트를 딸로 입양하기 위해 감옥에서 탈옥을 한 전과도 있다. 그가 이러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목적은 딱 하나이다. 바로 선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다. 그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불법을 저질렀다. 이런 장발장의 행위는 정의롭다고 봐야 할까?


이러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 중에 있는 장발장을 잡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그를 추적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자베르”라는 경감이다. 그는 상황이나 의도에 상관없이 범법이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의 수호가 그의 사명이었고,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른 이들을 정죄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면 당연히 주연은 장발장이고, 악역은 자베르 경감이다. 하지만, 의무론적 윤리에 따르면, 그들의 입장은 완전히 반대가 된다. 법치적 자유주의에 따르면 장발장은 악하기만 한 범죄자이고, 자베르는 선한 사람이다. 비록 장발장이 가졌던 범죄의 목적이 모두 선했다 하더라도, 그는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들을 평생 동안 어기며 살아온 사람이고, 반대로 자베르는 장발장 같이 정언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법으로 심판하고 처단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레 미제라블을 읽는 사람들 중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저자 빅토르 위고가 목적론적 윤리성을 옹호하는 측면에서 줄거리를 짠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독자들이 무의식적으로 목적론적 윤리성을 선호하고 있는 것일까? (참고로 목적론적 윤리성은 공리주의와 결과주의의 대표주자인 제러미 벤덤과 존 스튜어트 밀이 추구하는 윤리성이다)


정리하자면, 자베르는 의무론만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장발장은 100%까지는 아니어도 목적론에 더 치우쳐져 있는 사람이다. 장발장을 완전한 목적론의 신봉자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그래서 그의 목적을 다 이룬 후에 그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베르와 장발장의 대립은 의무론과 목적론의 대립이라고 봐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나는 의무론적 입장에서 두 등장인물을 비교했을 뿐이지, 자베르를 옹호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레 미제라블을 읽으면서 장발장을 선한 사람으로 여김과 동시에 ‘법치적 자유주의에도 이런 한계성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사람이 고안해낸 정의 중 완벽한 정의는 없다’라는 결론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 장발장은 자베르를 직접 손으로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자베르는 밧줄로 묶여 있었고, 장발장의 손에는 총이 있었다. 그 총 한 발이면 장발장은 수십 년간 자신을 괴롭혀온 자베르에게 복수를 함과 동시에 그가 오랜 시간 동안 겪어온 도망자로서의 삶을 청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복수와 이익이 아닌 용서를 선택했다. 이 상황은 은식기를 훔쳤던 과거의 장발장과 그를 용서해준 미리엘 주교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자베르는 장발장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그 날 강을 건너는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하게 된다. 나에게는 정말 충격으로 다가왔던 장면이자,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줬던 값진 장면이다.

용서를 선택한 장발장과 용서를 받은 자베르, 이 둘은 얼마 가지 않아서 서로 정반대의 입장에 처하게 된다. 자베르가 장발장을 체포할 수 있는 상황을 맞이했고, 장발장 또한 그의 목적을 모두 이룬 상태였기 때문에 체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여기서 자베르는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을 맞이한다. 바로, 눈에 보이는 세상의 법과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이라는 법이 서로 충돌한 것이다. 만약 자베르가 생명의 은인 장발장을 체포한다면, 그는 양심이라는 법을 어기는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고, 반대로 흉악한 범죄자 장발장을 놓아준다면 그가 지금껏 추구해왔던 세상의 법, 즉 정언명령에 대항하게 되는 “불법”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던지, 그는 법을 거슬러야 했으며, 그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자베르의 자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자베르는 자신이 지금껏 추구해 왔던 삶이 정말 정의로운 삶이었는가에 대해서 회의감에 빠졌을 것이다. 정의라고 생각했던 그의 행동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반대로 그에게 있어서 범죄라고 생각했던 장발장의 행동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만약 자베르가 자살을 택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경감으로서의 삶을 더 이상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앞으로 범죄자를 쫓을 때마다 장발장의 용서와 자베르 자신의 불법이 생각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베르의 자살이 곧 그가 평생 동안 지켜온 의무론적 윤리를 마지막까지 따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하기에, 그는 범죄자를 그냥 놓아주는 불법을 저지른 자기 자신에게 “자살”이라는 법의 심판을 내린 것이다.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은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베르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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