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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Jun 28. 2023

무신론의 고통 2

신 그리고 고통 2

(무신론의 고통 1에서 이어집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무신론자는 ‘악의 문제’ 혹은 '고통의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무신론자 수전 재코비는 <뉴욕 타임스>에 이런 말을 적었다. 


“칼바람을 맞으며 떨고 있는 노숙인들을 볼 때, 뉴스 미디어들이 자식 잃은 부모들의 처절한 슬픔을 무례하다 싶을 만큼 눈앞에 들이댈 때, 신앙을 가진 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전지전능하고 한없이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일들을 허락하실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아주 옳은 이야기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세상의 불공평함과 상처와 아픔에 대해 씨름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그들은 “세상이 원래 그래”라고 말하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들에게는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왜이리 악과 고난이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 반대로, 소위 ‘어정쩡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의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보다 훨씬 깊은 환멸을 느낀다. “살아 움직이고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은 세속적인 문화가 제공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과 위로를 주지만, 반대로 죽어 있는 신앙 그리고 왜곡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분을 철저하게 불신하는 무신론보다 훨씬 더 불리하다. 즉, 올바르지 않고 세속화된 신앙과 기독교는 고난을 마주하는 데 최악의 만성질환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의 문제에 관하여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무신론을 택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무신론이야말로 우리 삶에 나타나는 온갖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은가? 신이 없이도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으며, 더 정확히는 신이 없어야만 우리는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아니, 그전에 이미 신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밈(meme)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러한 정신착란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공통되게 직면하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도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개인이 선택한 행복과 안위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다.’ 과연 이런 입장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가?


   무신론자에게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생의 삶이 행복의 전부다. 지금 당장 그들이 거한 곳에서 누리는 행복이 최선일 뿐이다. 현대 사회는 이제 그 최선을 위한 것들만을 담는다. 서점에 있는 책들 중 스트레스나 염려를 다루는 책들은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거나 비참하고 우울한 기분을 느낄 때는 정말 중요하고 심오한 질문 -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인간은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가는가? - 을 던지라고 조언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에게 고통은 불행한 일이지만 동시에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 나오는 서적들은 그것을 잊는 방법, 그러한 감정을 다스리는 법에 더 집중한다. 긴장을 풀고, 일과 휴식 사이에 균형을 맞추며, 때로는 바닷가에 앉아 파도를 지켜보면서 부정적인 생각들을 싹다 날려버리라고 조언한다. 거기에 더해 편안히 쉬면서 즐거움을 안겨 줄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보길 권하며,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처리하는 마인드컨트롤 기술을 알려주기도 한다. 즉, 이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인생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철학적인 질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해야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더 정확히는 의식하고 싶어하지 않는 문제점들이 그들의 삶에 여전히 남아 있다. 첫째, 아무리 뛰어난 테크닉을 사용하더라도, 인간의 삶에 있어서 고통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못 가 깨지고 마는 거짓된 평온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두번째 문제는 첫째와 같은 문제이면서도 훨씬 더 비극적인 현실의 문제이다. 즉, 한 개인의 쾌락과 안락을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고통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레프 톨스토이는 인간의 삶이 행복을 구하고 행복을 손에 넣으려 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작은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생물의 보다 큰 행복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빼앗는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면 인간은 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즉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 많은 생물들은 모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고. 그리고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면 사람은 자신의 행복 (그것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사라지는)을 손쉽게 획득할  수없을 뿐만 아니라 획득했다 하더라도 곧 빼앗길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레프 톨스토이, 인생론/참회록, pp.36)


   정리하자면 이렇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그의 행복을 얻기 위해 나의 행복을 파괴한다. 물론 그는 그럴 의도가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단지 그는 그의 행복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내가 성공했을 때 그리고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쟁취했을 때, 다른 누군가는 나의 성공을 위한 실패자가 되고, 내가 하나를 가졌기에 그는 그 하나를 갖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다시 한번 우리의 삶에 고통의 불가피함을 설명해주는 근거가 된다. 또한 나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가 고통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회의적인 감정에 빠지게 만든다. 성공에 총량이 있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다고 본다. 그러나 행복에는 총량이 없다. 그것은 언제든지 확장될 수 있고 또 언제든지 줄어들 수 있다. 이 문제는 훨씬 더 심오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후에 다루도록 하겠다.


   어쩌면 무신론자들도 이러한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신앙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이러한 현실에 맞서 살아가는 방법을 차츰 배워가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두번째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심각한 세번째 문제가 남아있다. 바로 죽음이다. 톨스토이는 계속해서 설명한다.


“자신이 병에 걸리거나 체력이 쇠약해짐을 느끼기 시작하거나 다른 사람의 질병, 노쇠, 죽음을 보거나 하는 동안 인간은 지금까지 충실한 생명의 거처로 생각하고 있던 자신의 존재 그 자체까지도 (진실로 충실한 생명을 그에게 느끼게 해 주는 유일한 그것마저) 순간순간 일거일동마다 쇠약, 노쇠,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 그는 자기 자신의 생명이 싸움을 걸어오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파멸과 위험과 항상 증대하는 고통에 직면하고 있을뿐 아니라 끊임없이 죽음을 향해서, 즉 개인의 모든 행복의 가능성과 생명이 모두 파멸되는 상태를 향해서 어쩔 수 없이 차츰차츰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레프 톨스토이, 인생론/참회록, pp.36)


   여기서 무신론이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가 드러난다. 물론 우리에게는 쾌락 이외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으뜸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들을 포함하여 지금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죄다 빼앗기게 될 미래에 대해 아무 두려움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이는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이미 수많은 죽음이 존재한다. 오랜 시간과 노력의 의미없는 죽음, 활력있고 기운 넘치던 청년의 때의 죽음, 부유함과 안락함의 죽음, 인간관계의 죽음 등. 우리가 악과 고통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죽음의 일종이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들은 죽기 마련이다. ‘유한함’ 속에 갇혀 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죽음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 즉 ‘무한한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두면 된다. 이것 이외의 모든 방법들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무한한 것’에 의미를 두는 삶은 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죽음이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에 인생의 의미를 둘 때만 고난을 견뎌 낼 수 있다. 이는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고난이 파괴할 수 없는 본질’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철학이나 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뤽 페리는 결론짓는다. “예를 들어, 현대 심리학이 이 과정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에게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고찰 마저도 배부른 고민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은 이미 죽음보다 나은 점이 없기 때문이다. 더 슬픈 사실은 그런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다는 것이다. 물질주의와 자본주의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비난한다. “그것은 다 너의 불성실함 때문이야. 네가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너도 그런 시궁창같은 삶을 살지 않았겠지. 저 사람들을 봐. 저들과 너의 차이가 뭔지 알아? 저들은 고통을 극복하고 돌파했지만 너는 그러지 못했다는거야.” 무신론 마저도 그들을 향해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미안하지만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신이 너를 벌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너를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켜주기 위해 준 경험의 시간도 아니야. 물론 네가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네 자유지만, 사실은 그저 운이 안좋게 하필 너에게 떨어진 불행 덩어리야. 그리고 설령 지금 당장 네 앞에 그 모든 괴로움들이 사라진다 해도, 결국 그 끝에는 너와 네 주변의 모든 것들도 사라질거야. 네 인생에 있어서 영원한 것은 네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 이외에는 하나도 없어.” 이 모든 현실의 목소리에 그들은 결국 스스로 인생의 종착지라 생각되어지는 곳으로 곧장 돌진한다. 누군가는 밧줄을 쥔 두 손으로, 누군가는 높은 건물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두 발로.


   무신론의 냉담함과 외로움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신을 주목하게 만든다. 그를 통해 전해져 오는 평온함은 부정적인 생각을 쫓아낸다거나 하는 ‘긍정의 힘’ 따위의 것이 아니다. 그의 존재, 즉 내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의 실존함을 믿는 것은 나로 하여금 내 앞에 다가온 모든 고통에 ‘의미’가 있음을 확신하게 해준다. 그분은 내게 고통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돌파할 힘을 주실 것 또한 약속하시고, 그 끝에는 지금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광스러운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말씀해주신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있어 죽음은 인생의 종결이 아니다. 죽음은 나의 인생의 절정의 순간이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여행을 한 다음 드디어 집에 도착한다. 수십 년 동안 목소리만 들어오다가 이제는 얼굴을 보고 실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부르신 분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마지막 부르심은 집으로의 부르심이다.” 우리는 여전히 여행자이며, 신앙인으로서 가야할 길은 찾았지만 목적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는 모든 순간들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고통에도 여전히 그분이 부여하신 의미가 존재한다. 무한하신 분께서 부여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의미이다. 나는 그 의미를 위해 신을 선택한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여정은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더 구체적으로 깨닫기 위한 여정이 될 것이다. 오, 주님. 원하건대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소서.(출애굽기 33:18)





참고서적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by 팀 켈러

인간 폐지 by C.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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