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과거에 묶이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후회하는 것이다. 평생동안 단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악행이나 어리석은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과거를 바꾸길 원하지만 이미 그것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소원이다. 그저 '할걸, 하지 말걸'이라는 탄식만을 읊조릴 뿐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후회는 타인의 문제가 아닌 오로지 나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이기에, 그로부터 찾아오는 고통에 대해서는 그다지 그것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는다. 자신이 뿌린 씨앗을 자신이 거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방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인간을 과거에 묶어둔다. 흔히 '원한'이라 불리는 이것은 후회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독소가 되곤 한다. 후회는 우리 자신이 내린 선택과 관련이 있지만, 원한은 반대로 타인이 내린 선택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전혀 다른 고통의 문제가 찾아온다. 그것은 곧 나의 잘못된 선택이 아닌 타인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찾아오는 고통의 문제다. 그들의 요지는 간단하다. '어째서 저런 잔인하고 '악한' 인간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활개하는 것인가? 그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어째서 저들의 칼을 여전히 날카롭게 두시는가? 그분은 가인의 아들들에게 상처 입은 아벨의 아들들의 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인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보려 한다. 물론 그 진리에 완전히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악'을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인간이 만든 하나의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닌 하나의 '실체'로 본다. 그리고 그 실체에 대한 진리는 100%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희망을 갖고 추구해 나가는 목표"이다. 악이라는 실체를 완전히 이해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하기에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문제들과 질문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은 분명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톨킨(Tolkien)이 말했던 것처럼 "세상 현상을 모조리 알게 되는 것이 우리가 할 바는 아닐지라도, 우리 안의 현상들을 이해하고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시대의 구조를 규명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분야 속의 악을 뿌리 뽑는 일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먼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악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수십 명, 수백 명을 죽인 과거의 지도자,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자신과 똑같은 인간을 희롱하고 처참하게 죽여버린 살인자, 그리고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행악자들부터 생각해 볼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끔찍한 존재로 변질되었는가?" 도대체 그들의 악의 기원은 어디인 것인가? 신이 그들을 태초부터 그렇게 만드셨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악인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환경인가, 혹은 또 다른 악인인가? 어쩌면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적인 존재는 아닐까? 흔히 우리는 영화나 책에서 보는 것처럼 어느 한순간에 귀신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거나 단 한 번의 계기나 목적이나 사건으로 인해 선했던 인간이 순식간에 악한 존재로 변질되는 것을 상상하곤 한다. 물론 그런 부류가 아예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악인은 그렇게 탄생하지 않는다. 미국의 한 정신과 의사로서 고통과 악의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경험하고 또 연구해 온 스캇 펙(Scott Peck) 박사는 그의 책 "거짓의 사람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개인의 악은 어느 정도는 어린 시절의 환경, 부모의 죄, 유전적인 기질로까지 원인이 추적될 수 있다. 그러나 악이란 언제나 자신이 내리는 선택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일련의 선택들의 총집합이라 할 수 있다. (거짓의 사람들 pp.237)"
악인이 탄생하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책임인가? 그는 그렇게 끔찍한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악인이 탄생하는 과정 속에는 수 없이 많은 연속적인 '선택'이 들어있다. 악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결정짓는 선택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악의 문제는 곧 자유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사회심리학자 에히리 프롬은 인간 악의 기원을 하나의 발달 과정으로 본다. 인간은 한 점(사건 혹은 계기)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하얀 인간에서 검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속적인 선(line) 위에서 조금씩 검게 변해가는 것이다. "즉 우리는 악하게 지음받았거나 어쩔 수 없이 악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오랜 선택들을 통하여 오랜 시간 서서히 악해져 간다는 것이다. (거짓의 사람들 pp.148)" 물론 한 아이가 진정한 선택의 자유 안에서 의지를 펼칠 기회를 갖기도 전에 그의 정체성과 그의 존재를 형성하기까지 일어나는 일련의 비극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그가 직접 내리는 연속적인 선택들이야말로 그를 악인으로 변질시키는 가장 큰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제 2차세계대전 중 사랑하는 아내를 비롯해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거의 모두 잃은 유대인 정신과 의사이자 수용소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수면 부족, 음식 부족, 온갖 정신적 스트레스 따위의 조건들을 보면 재소자들이 결코 특정 방식의 반응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지만, 각 포로가 결국 어떤 사람이 됐느냐는 수용소 자체의 영향력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내적 결단의 결과였다. ...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정신적, 영적으로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 스스로 결단할 수 있다. 수용소에서도 자신의 인간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의 뜻 pp.18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악의 길로 접어든 어떤 이가 여전히 그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그동안 걸어왔던 길을 돌이킨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엔 빈익빈 부익부 경향이 있듯이 이 영역에는 선익선 악익악의 경향이 있을 수 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25:29)" 에히리 프롬은 이러한 선익선 악익악의 법칙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우리의 선택 능력은 인생 경험과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했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잘못된 결정을 내려왔을수록 우리 마음은 그만큼 딱딱해져 가고, 더 자주 옳은 결정을 내릴수록 우리 마음도 그만큼 부드러워진다. 인생의 단계 가운데 자신감, 인격, 용기, 확신 등이 늘어나는 단계일수록 바람직한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도 같이 늘어나, 마침내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생각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른다. 반대로 일단 비굴하고 비겁한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들은 계속 나를 약하게 만들어 점점 더 비굴한 행위를 하게 되며 결국 내게서 자유를 빼앗아 가 버리고 만다. (거짓의 사람들 pp.146-147)"
마지막 대목이 아주 흥미롭다. 악은 결국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간다. 물론 선택의 자유는 여전히 존재하며, 애초에 악은 그 선택의 자유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 악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무엇인가? 이쯤 되면 우리는 자유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실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실체는 들여다볼수록 복잡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질문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지만 자유가 없다." 이는 역설처럼 들리지만 자유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의 차이일뿐 전혀 모순된 말이 아니다. 악인이라 해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직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자기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욕망들이 부패되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타락한 인간은 심각한 도덕적 속박 상태에 놓여지는 것이다. 여기서의 도덕적 속박이란 곧 앞서 말했듯이 나의 마음이 선을 원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기독교의 덕목들을 실천하기 위해 진지하게 시도해보았던 지난 날들을 기억해보길 바란다. 혹은 스스로 더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아라. 그러면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아갔거나 오히려 그 이하로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도덕적 속박, 즉 자유의 상실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런 속박의 상태에 놓인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겸손을 빚어내는 기초적인 단계들 중 하나가 된다.
결국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존재 유형, 즉 하나님과 선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며 자신의 선택을 고집할 것인가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후자의 선택은 그 사람을 자동적으로 악의 노예가 되게 만들고 스스로를 지옥으로 빠지게 한다. 도덕적 속박 상태에 놓여진 그들은 더 이상 지옥에 갈 필요가 없다. 이미 그들의 삶이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시지 않는다. 우리를 벌하는 것은 우리 자신일 뿐이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것을 선택해서 거기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거기서 나와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다만 그들의 가치관이 그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을, 죽기보다 위험하고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우며 너무 어려워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 문제다. 그들은 그곳이 더 안전하고 지내기 쉬워 보여 그냥 지옥에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그쪽이 더 편하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
모든 이들의 내면 속에는 악의 수레바퀴가 존재한다.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이 수레바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빠르고 거세게 굴러간다. 개인의 태도에는 일종의 관성이 생긴다. 그것은 곧 한 번 움직임이 시작되면 반증이 눈앞에 있어도 계속 고수하려는 성질이다. 이 관성을 끝내 제어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악인'이 된다. 그들의 수레바퀴를 멈춘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부인'이다. 이는 지금껏 자신이 쌓아온 탑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이 지금껏 옳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모조리 그릇된 것일 수도 있다는 뼈아픈 인정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자기부인이야말로 진정으로 처절한, 그러나 의미있는 '고통'이다. 끊임없는 자기회의와 자기비판의 자세를 힘써 지키며 악으로 치닫는 관성의 힘을 완전히 이겨내고 다시 선을 향해 전진하는 치열한 전투이기 때문이다. 이때 동반되는 고통은 스스로의 악을 근절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꽤 많은 수고와 작업이 요구된다. ... 처음 한동안은 혼돈의 상태가 이어진다. 이 상태는 퍽 불편한 상태다. 그러나 그것은 개방의 상태이며, 따라서 배움과 성장의 상태다. 우리가 새롭고 좀 더 나은 비전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혼돈의 상태를 거치기 때문이다. (거짓의 사람들 pp.456)"
하지만 과연 그것이 개인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가? 자신이 악하다는 사실마저도 인지하지 못하는 악인이 자신이 속박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과연 한 악인이 스스로 그의 내면에 있는 맹렬하게 굴러가는 악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는가?이는 또 하나의 단순한 질문으로 이어진다.'인간은 바뀔 수 있는가?' 이 부분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질문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가능하시다'뿐이다. 하나님,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선과 악의 연장선 위에 서있는 존재가 아니라 선(goodness) 그 자체이시다. 따라서 근본적인 치유는 그분께 달려 있다. 하지만 이 치유 마저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전제로 한다. 치유 자체는 하나님께서 진행하시지만, 자신이 치유되기를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그를 치유하실 수 없다.
치유를 거부한 이들은 끝내 그들의 내면에 있는 악의 수레바퀴를 멈추지 못한다. 더 정확히는, 그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며, 설령 인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멈추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악인으로서 사회를 활보하며 의인과 악인을 죽이려 한다. 여기서의 살인은 꼭 육체의 살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악은 개인의 영혼마저 죽인다. "생명 특히 인간의 생명에는 여러 가지 필수적인 속성들이 있다. 지각, 운동, 인식, 성장, 자율, 의지 따위가 그런 것이다. 실제 몸은 죽이지 않더라도 이런 속성들 가운데 그 어떤 것을 죽이거나 죽이고자 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 한 마리나 어린아이 한 명을 털끝 하나 만지지 않고도 '파괴시킬' 수 있다. (거짓의 사람들 pp.72)" 이러한 확장된 의미의 '살인'을 사회에 적용해본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영혼이 죽어 있는 자들이 활보하는 저주받은 땅이자, 살인자들로 가득 한 땅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그 행위는 실제로 혐오하기에 마땅하다) 육체적인 살인보다 더 위험한 것이 바로 영적 살인이다. 그것은 살인의 행위와 그것으로 인한 상처가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악인들로부터 퍼져 나가는 고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요구하신다. 그 책임은 땅에서 혹은 하늘에서 반드시 지게 될 것이다. 심판의 지연이 곧 심판의 부재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첫째, 우리는 악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저 한 사건의 단면을 보고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추측할 뿐,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 마음대로 그들을 악인이라 정의하고 또 하나님께 그들을 심판하라고 요구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둘째, 당신이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사람 마저도 하나님에게는 길 잃은 양,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악인'이라 정의하는 그분의 자녀들에게도 조금의 시간을 더 허락하신다. 비록 그 시간은 영원에 비하면 찰나의 시간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기다리시고, 죄에 대한 책임마저도 잠시 미루신다. 부디 이 부분에 대해 불공평하다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불만을 품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하신 질문을 똑같이 던지실 것이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4:4)"
악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회심의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더 많은 죄를 저지르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모든 범죄로 인해 생겨난 피해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가 인정하는지와 상관없이, 주님은 그 범죄의 순간을 통해서도 선을 만드는 분이시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동의 없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악을 사용하여 복합적인 선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이다. 다만, 앞에서 강조했듯이 하나님이 순수한 악으로부터 복합적인 선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고 해서 순수한 악을 저지른 사람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을 수는 있어도 -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 사건 중 최악의 사건인 동시에 최선의 사건이지만, 유다의 역할은 여전히 악한 것이다 (고통의 문제 pp.168). 어떤 의로운 사람은 '순수한 선'을 통해 이웃을 돕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 반대로 어떤 악한 사람은 이웃의 영혼을 살인하는 등의 '순수한 악'을 저지르지만, 그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가룟 유다처럼 하느냐 요한처럼 하느냐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도구로써 하나님을 섬긴 것이며, 후자는 아들로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다. 어떤 이는 스스로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악한 행동을 하지만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사탄의 자리를 맡겠다고 자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처럼 사탄의 역할을 맡겠다면, 사탄이 받을 대가 또한 감수할 준비를 해야 한다. (같은 책 pp.170)" 오스 기니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음과 같이 선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구의 리더들과 민족들이여, 이것이 바로 당신들의 선택이오. 그 선택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를 것이오. 그 결과로 심판 받을 것이고, 세상은 그 모습을 보고 자업자득이라 할 것이오. 그 심판의 날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수백만의 생명들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겠소? 가정에 대한 당신네들의 어리석은 대안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수많은 가정과 그 자녀들의 산산조각 난 인생에 대한 마땅한 보응을 받지 않겠소? 당신들이 숭배하는 맘몬신이 몰락하고 그 신도들이 처참하게 버림당할 날이 오지 않겠소? 눈부신 과학 기술이 부리는 마술 같은 예술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그 숭배자들은 만인이 투쟁하는 원시의 정글 상태로 돌아갈 날이 오지 않겠소? 미래가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당신들은 지금 바람을 뿌리고 태풍을 거두게 될 것이오.”
마지막 심판에 대한 오스 기니스의 선포는 수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해왔던 선포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반대로 그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었다. 오스 기니스의 선포를 읽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가? 통쾌했는가? 끝내 회심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임한다는 것. 사탄의 역할을 맡은 악인은 사탄이 받을 대가 또한 함께 받게 될 것이라는 것. 이러한 악인들이 받게 될 저주와 심판을 상상하며 일종의 만족감을 느꼈는가? 물론 그 감정은 하나님께서 끝내 공의를 이루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런 만족감을 느꼈다면, 당신은 그 감정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한 인간이 회심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채 끝내 지옥불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는 의미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정으로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이는 끝내 당신이 저들과 똑같이 사탄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음을 겸허이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원수들이 저지른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벌을 내리는 것은 기독교적으로도 지극히 옳은 행동이다. 우리는 그들의 죄를 혐오하고 미워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을 즐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적을 죽이거나 벌해야 할 때라도 자기 자신에게 품는 마음을 그에게도 품고록 -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며 이 세상에서든 다른 세상에서든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도록,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도록 - 애써야 한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의 진정한 의미이다.
2022년 겨울, 한 장소에서 100명이 넘는 청년들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는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그 당시 끔찍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서 진정한 악함을 보았다. 그들은 죽은 청년들을 조롱했다. 다 그들의 업보라고 주장했다. 귀신을 숭배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니 달게 받으라는 말이 진정으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말이었는가?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한 나라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진정 목숨을 잃은 청년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전해줄 유일한 말이었는가? 그 날을 생각하면 나는 계속해서 이런 결론을 품게 된다. '진정한 악은 평범함 속에 존재했다.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심지어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당당하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것을 선으로 오해한다.'
악의 문제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을 다룰 시간이다. 그것은 악인에 대한 심판, 악인의 형통함, 악인들에 의해 찾아온 고통과 같은 문제들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이다. '내가 왜 저런 인간쓰레기때문에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 때, 진정으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악이란 무엇이며, 악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악인이라고 하면 감옥에 있는 위험한 사람들 혹은 공공의 적이라고 인식되어지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스캇 펙은 나치와 연관된 사람들을 연구한 에히리 프롬의 서적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인간의 악이란 옆집에 사는 세 아이의 엄마나 저 앞 교회의 집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경험에 따르면 악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며 대부분은 그냥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더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 우리가 사는 동네 저 골목에서 우리는 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부유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으며, 유식할 수도 있고 무식할 수도 있다. 그들이라고 해서 유별난 요소는 결코 없다. 그들은 게시판에 나붙은 지명 수배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 학교 교사로서, 경찰로서, 금융인으로서, 사회 단체 회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건실한 시민'일 가능성이 많다. (거짓의 사람들. pp.80, 123)"
"악인들이 왜 계속 의인들을 괴롭히는가? 왜 하나님은 그들을 그저 내버려 두시는가?" 일반적으로 이런 질문에서 말하는 악인은 흉악한 범죄자 혹은 남을 향해 폭언이나 폭행등으로 피해를 주는 이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제는 '악인'에 대한 개념 자체가 뒤집혀야만 한다. 악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평범하며, 때로는 정의로워 보이고, 웃음기를 띠고 있으며, 때로는 친절을 일삼는 자들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악인들은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수많은 악인들은 살면서 불법이나 범죄를 저지른 적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의 기준은 사회적 규범과 같은 외적인 것에 맞춰져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악인은 감옥 안에 있거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 무지히고, 무례하며, 배려가 없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 하지만 그에 비해 자신은 법을 지키고, (외형상의) 도덕적 순결을 유지하고자 갖은 애를 쓰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옷도 잘 입고, 출근 시간도 잘 지키고, 세금도 잘 내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악함에 대해 더 올바르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갖고 있던 의인과 악인의 기준이 완전히 전복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 있다. 우리는 죄(sin)와 범죄(crime)를 동일한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둘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범죄가 개인의 행동을 통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죄는 그것을 포함하는 훨씬 더 광범위한 개념이다. 사기, 도둑질, 험담, 조롱, 살인과 같은 행위는 악의 본질이라고 볼 수 없다. 악의 본질은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있으며, 그곳은 곧 분노와 시기와 기만과 음란과 탐심과 이기심과 나태와 위선, 그리고 거짓과 교만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거짓과 교만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가장 깊숙히 뿌리박혀 있는 악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거짓과 교만에 속아 우리는 자기 자신을 당연하다는 듯이 '의인'의 범주에 넣어두고 논쟁을 시작한다. 논쟁을 마치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서는 여전히 존재하는 내면의 악을 거짓된 말로 숨기거나 합리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악 자체보다는 그 악의 위장된 모습을 더 자주 본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증오를 덮고 있는 미소, 분노의 탈을 쓴 부드러운 매너, 그리고 불끈 쥔 주먹을 감싸고 있는 비단장갑이다. 악한 사람들은 위장 전문가들인 까닭에 그들의 사악성을 콕 꼬집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의 위장은 대개 판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악인이 아니다. 저 극악무도한 녀석과 나는 서로 다른 존재다. 내가 저 인간보다는 분명히 낫다'라는 생각이야말로 악인들이 가장 많이 품는 확신이다. "악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은 죄의 난해성, 완고성, 경직성에 있다. 악한 사람들의 핵심적인 결함은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에 있다. (거짓의 사람들. pp.123)"
'악의 문제'라는 주제에서 당신이 딱 한 가지만 기억해야 한다면, 다음을 기억하면 된다. 여전히 많은 의문은 남아 있지만, 이것이 지금 당장 악에 대해 내린 나의 결론이다: 신앙의 변혁은 한 악인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될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세상의 소망은 단 한 명의 의인을 투영하여 세상을 볼 때 발견될 것이다.
'악의 문제'를 처음으로 꺼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눈 모든 이야기들은 사실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악인을 찾아 그들과 우리의 관계를 끊어버리기 위한 목적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과 우리를 하나로 묶기 위함이었다. 지금껏 수도 없이 언급한 그 '악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다. 맨 처음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악인'이라는 표현으로 악인이라는 개념을 우리와 분리시킨 상태에서 이야기하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 분리라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누군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했다거나 하는 등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만한 도전을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것을 한 개인의 쾌거를 넘어서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함께 누릴 쾌거로 여긴다. 나도 그런 자랑스러운 인간 중 하나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 중 누군가가 극악무도한 짓을 하면 그 사람을 '인간'이라는 종족에서 가려내어 '짐승'처럼 취급한다. 100% 그 사람 개인의 문제로 여기면서 '인간'이라는 그 사람과 자기 자신 사이의 공통분모를 공유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악에 대한 정의가 완전히 새롭게 되고 선과 악의 기준이 다시 재정립되는 과정을 거친 뒤에는 더 이상 신에게 "어째서 악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라고 질문할 자격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혀 다른 단 하나의 질문만이 남게 된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24, 새번역)"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은 여기서 시작된다. 내가 바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그 탕자임을 깨닫는 순간, 아버지를 향한 그의 귀향이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자기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을 부르러 왔다."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거쳐 우리는 또 하나의 본질적인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나에게 있는 것이든, 타인에게 있는 것이든, 그 악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먼저는 '판단'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리는 한 개인의 행동을 보며 그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 판단이야 말로 과연 옳은 행동인가.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악인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함을 인정할 수 없는 까닭에 다른 사람들을 탓함으러써 자신의 결함을 무마시키려고 한다. (거짓의 사람들 pp.48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도덕적인 판단을 악한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 오히려 선인지 악인지를 판단하려 하지 않는 자세야말로 더 큰 악이다. 세상에는 반드시 '악'이라고 정의해야만 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히틀러는 분명한 악인이었고, 독일 수용소에서 유대인에게 행해졌던 생체 실험은 분명히 악한 것이었다. 어떤 이가 악한 행동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고 막아야만 한다. 세상엔 동정이나 용납, 허용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분별'해야 한다. '판단해야 하는가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판단해야만 한다. 다만 우리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언제 어떻게 지혜롭게 판단할 것이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훈계하고 또 권면할 의무를 갖는다. 누군가가 당신을 찾아와 힘든 고민을 털어놓는다면, 먼저는 그에게 귀를 기울이며 기쁜 것에는 함께 기뻐하고 또 슬픈 것에는 함께 슬퍼해야 한다. 세상에 그러한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위로만 받고 있을 수는 없다. 진정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위로를 거쳐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엘리야 선지자도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지만, 그것은 대화의 시작에 불과했다. 위로를 받은 후에는 본격적으로 그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분 자체에 대해 듣고 배웠다. 우리도 이처럼 말씀을 배우고 또한 배운 것을 전해야 한다. 아파하는 이들을 사랑으로 위로해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겸손 안에서 그들이 볼 수 없었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들의 내면의 어두운 부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비춰주어야 한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디모데후서 2:25-26, 4:2)"
하지만 타인을 향한 훈계와 권면보다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위선자여! 먼저는 네 눈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정확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판단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시지 않는다. 다만 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겸손 안에서 나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음을 계속해서 떠올려야 한다. 리처드 포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만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착각을 주의하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언제나 옳으시다. 모든 인간은 자기에게 허물과 연약함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며, 다른 이들에게서 배우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권력은 우리를 악마의 골짜기로 인도할 것이다. (돈, 섹스, 권력, pp.246)"
결국 악을 근절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자기성찰이고 자기정화이다. 스캇 펙은 자기 정화야말로 사람을 치유하고 악인을 사랑하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적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자신을 정화하게 되면, 비로소 아름다운 일은 벌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그의 영혼의 경계선은 투명하다 할 만큼 깨끗해져서 독특한 빛이 그 개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거짓의 사람들 pp.509)"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허무주의적인 의식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변하지 않는다. 설령 내가 자기 정화로 인해 조금이나마 더 의로운 사람이 되어 저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나를 괴롭히는 자들이 덜 악하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들은 그런 우리의 사랑을 이용하려 들 것이다. 악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손 들고 포기해야 하는가? 악을 본질상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겨 둬야 한단 말인가? 그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인생에 실체가 되어 찾아오는 것을 고통 속에서 묵묵히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가?'
이런 허무주의적인 의식에 빠져 있을 때면, '파괴'라는 아주 간단한 결론을 취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온다. 즉 '저 작자들 머리 위에 지옥 같은 폭탄을 떨어뜨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과 같은 살인자가 되는 길이다. 그것도 그들을 살인하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신까지도, 신체적으로가 아니라면 영적으로도, 파괴하는 것으로 끝을 내고 말 것이다. 우리는 또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죄 없는 사람들까지도 해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파괴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통해 악을 근절시키라고 강하게 권면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19-21)"
사람들은 흔히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고는 그냥 무시한다. 그리고는 다른 곳에 가서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해야 악을 이길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그런 이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막는 것은 질문에 대한 정답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지식적인 한계가 아니라 이미 그 정답을 알고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고자 하는 힘과 의지의 부재다. 그래서 그들은 사탄이 에덴 낙원에서 아담에게 던진 최초의 질문을 또 다시 직면한다. "하나님이 정말 그리 말씀하셨느냐? (창 3:1)" 이제 세상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불완전하고 불명료한 계명이라 생각하며, 사람이 그것을 풀이하고 해석하여 자유로이 판단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주 단순하다.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거라. 그것은 너희의 일이 아니다. 다만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인을 사랑하라.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도와주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명령에 대한 단순한 복종이다. 하지만 우리 내면 속에서는 "단순한 행위를 밀어내고 이중적인 생각이 끼어든다. 복종하는 자녀가 되기는커녕 양심의 자유를 뽐낸다. 윤리적 갈등을 증거로 끌어대는 것은 복종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현실성으로부터 인간의 가능성으로, 믿음으로부터 의심으로 퇴보하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 pp.81-82)
악은 여전히 복잡한 문제다. 그러나, 그것을 근절시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며, 그것의 본질은 반드시 사랑이어야만 한다. 방법은 자기 성찰, 배려, 인내, 겸손, 훈계, 정의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인 사랑만큼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사랑은 반드시 빛을 흘러보낸다. 어떤 이는 그 빛의 격려를 받아 더 가볍게 길을 걸어간다. 어떤 이는 악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가 그 빛을 통해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 빛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공격을 가해 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악한 행동들은 빛 앞에 드러나 타 태워져 버리는 것 같게 된다. 그리하여 악한 에너지는 소모되고 견제되고 중화된다. 이 과정이 빛을 발하고 있는 사람한테는 아주 고통스러울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악이 이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악은 반드시 소멸하고 말 것이다. (거짓의 사람들 pp.509)"
스캇 펙은 한 노신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것보다 사랑이라는 방법론을 더 구체적으로 말할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그 노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을 다루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그 악을 정복하는 데도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그 모든 방법들은 한 가지 진리의 여러 다른 측면들에 지나지 않는다. 즉 악을 정복하는 유일하고 궁극적인 방법은 그 악이 인생을 자발적으로 생명력 있게 살아가는 인간 안에서 그냥 질식당해 버리도록 하는 것이라는 진리다. 스폰지에 피가 흡수되고 가슴에 창이 날아와 박히듯 악이 거기에 흡수되어 버리는 날, 그 악은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거짓의 사람들 pp.510)"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 원리가 무엇인가?' 이런 물을들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세상엔 피해자가 승리자로 바뀌게 되는 신비스러운 비법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러한 신비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떠올리며 C.S.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결코 배반하지 않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피해자가 되어 배반자 대신 죽임을 당하게 되면, 법률은 효력을 잃고 죽음마저도 방향을 반대로 돌릴 것이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