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향: 서문

by 아로새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영혼의 떨림을 느끼는 순간을 겪기 마련이다. ‘영혼이 떨린다’라는 말을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영혼만큼은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뚜렷하게 기억한다. 이는 단순한 흥분의 상태도 아니며, 행복이나 쾌락의 느낌도 아니다. 그나마 가장 비슷한 느낌을 하나 떠올린다면 ‘경외심’이 있을 것이다.


나는 ‘청년’이라는 단어를 “인생에서 처음으로 ‘의미’라는 단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라 규정하고 싶다.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적인 유익이나 결과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신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처음 우리는 영적 유아기로서 신을 향해 ‘주옵소서’라는 단어만 되풀이한다. 신자로서 가지는 보람이나 가치는 따지지 못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이나 은혜 외에는 보지 못한다. 물론 이 시기에 있다 해서 꼭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나 유아기를 지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러한 영적 유아기의 중단을 선언하신다. 그때 우리는 한 명의 신자로서 진정으로 중요한 질문들 앞에 서게 된다.


이 시기를 벗어나면 의미를 따지는 시기가 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따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어떤 가치가 있으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 인생을 놓고 묻게 됩니다. 나의 신분, 가치, 인생이 갖는 의미를 묻는 날이 옵니다.
(박영선)
쉰 살의 나를 자살로 이끈 나의 의문은 철없는 아이에서 가장 지혜로운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단순한 의문이었다. … 이 의문은 이렇다.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일에서 무엇이 생길까? 내가 내일 하게 될 일에서 무엇이 생길까? 나의 전 생애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이 의문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다. ‘왜 나는 살아야 하고, 왜 무언가를 원해야 하고, 왜 무언가를 해야 하는가?’ 이 의문은 또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불가피하게 내게 닥쳐올 죽음에 소멸되지 않을 어떤 의미가 내 삶 속에 있는가?’
(레프 톨스토이)

‘의미’라는 단어를 곱씹어보는 시간은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삶의 변화들을 선물해준다. 같은 질문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해온 과거 신앙의 선배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그 삶을 지탱하는 내면의 기둥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에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는 유의미한 시간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거쳐가는 중간에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났다.

image.png

“탕자의 귀향”의 배경이 되는 성경의 탕자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가장 명료하고도 깊이 있게 짚어주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동시에 전해준다. 이 비유를 묵상하는 계기가 되었던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은 ‘의미’를 찾는 나의 여정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또 다른 여정으로 이어주었으며, 그 속에서 나는 진정으로 영혼의 떨림을 느꼈다. 돌이켜 보면, 그 날들은 분명 내 인생에 있어 ‘또 한 번의 회심의 순간’이 되었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그 새로운 거듭남의 순간이 이 이야기를 읽게 될 많은 이들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원한다.


이 글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오랜 시간 동안 기독교를 떠나 있던 사람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미 기독교의 복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에게는 더더욱 이 내용이 중요하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 온 사람들일수록 복음을 오히려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설령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다 해도, 그 복음을 삶에 적용시키지 못한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이들과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가 다시 복음이라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리 안에서 연합되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