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난 작은 아들

작은 아들 1

by 아로새김

한 가족이 있었다. 그 가족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었고,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그에게 맡기신 일들을 척척 해 나갔고, 모든 일에 성실한 태도로 임하는 모습을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달랐다. 처음에는 그의 형의 모습을 따라 열심히 일하고, 또 아버지가 그 집에 정해두신 규율을 따라 살아갔지만, 그런 삶이 답답하고 고지식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누가복음 15:12)


작은 아들은 그의 아버지에게 가서 먼 미래에 그가 받게 될 유산을 지금 당장 달라고 요청하였다. 지금의 독자들은 이런 작은 아들의 태도를 단순히 버르장머리 없이 아버지께 돈을 요구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풀어내시던 당시의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중동 문화에서 이 작은 아들의 발언은 단순히 무례한 정도의 말이 아니었다. 이것은 아버지께 돈을 달라고 부탁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의 인생에서 아버지가 사라져 주길 바란다고 말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재산의 일부를 물려받는 것 자체를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 유산의 분배는 정말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면 아버지가 죽은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버지의 재산이지 아버지가 아니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 없다: “아버지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필요 없고 (사실 그동안 아버지가 제 인생에 필요했던 적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있어 단순히 유산을 물려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관계도 지겹습니다. 그러니 지금 재산을 제게 주십시오. 그것 말고는 아버지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낸 작은 아들은 그대로 아버지와 그의 집을 떠났다. 그의 가출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온 가정을 내동댕이치는 행위인 동시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오랜 시간 동안 지켜온 전통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행동이었다. 아버지와의 관계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면서, 그의 가족과 그의 공동체가 수 십 년간 유지해왔던 그 모든 가치와 질서에 대한 거절이었다. 아버지의 보호도, 아버지의 개입도, 아버지의 조언도, 아버지가 세우신 모든 규율도 하나같이 귀찮을 뿐이었는데, 아버지의 재산을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그 모든 귀찮은 것들로부터 벗어나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세상에서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 비유를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해준다. 사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재산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원하지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분이 이 세상 가운데 정해 두신 규율이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건강, 지적, 정서적 은사 같은)을 활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드러내는 대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인정과 칭찬을 받으며, 보상을 다투는 데 써먹고 있는 내 모습에 놀라고 또 놀란다. 아버지가 주신 선물들을 싸들고 ‘먼 지방’으로 가서 그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착취하기에 급급한 세상을 섬기는 데 죄다 쏟아부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으며, 제힘으로 삶을 꾸려갈 수 있고, 눈곱만큼도 간섭받고 싶지 않음을 시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그 저변에는 노골적인 반항,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 그리고 “아버지가 얼른 죽었으면 좋겠어”라는 무언의 저주가 깔려 있다.”


...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누가복음 15:12)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은 작은 아들의 행동보다도 더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무례한 부탁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그가 집을 떠나는 모든 과정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셨다. 왜 그렇게 가만히 있으셨는가? 한편으로는 순순히 아들을 보내준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아들이 집을 떠나면 온갖 고생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아버지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몽둥이로 아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그의 가출을 막아 그의 고통을 덜어 주었어야 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 앞에서도 우리는 스스로의 뻔뻔함을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막으시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째서 나의 길을 막으십니까? 나를 좀 내버려두십시오! 저도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또 그것을 할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상 그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고, 그 길을 신나게 걸어가다가 이후에 그 길이 실제로 어떤 길이었는지를 깨닫고 그곳에서 모질게 고난을 당하게 되면 다시 아버지께 돌아와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화를 낸다. “왜 나를 그냥 내버려두셨습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보십시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나를 왜 이리 괴롭게 하십니까? 이렇게 될 줄 아셨더라면 저를 진작에 막으실 수 있지 않으셨습니까?” 한 신학자이자 사제인 헨리 나우웬은 이러한 우리의 모순된 격분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얼마나 이야기해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앞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알려주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찾고 있는 것들이 집에 다 있다는 사실을 믿게 하려고 무척 애썼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동원해 자식들을 다시 데려오고 싶었습니다. 슬하에 두고 상처받지 않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사랑이 너무 컸습니다. 한없이 사랑하므로 강요할 수도, 속박할 수도, 밀어붙일 수도, 끌어당길 수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 사랑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오든지 선택할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근원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는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들은 집을 떠났다. 아버지와 그분의 집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며 그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향해 나아갔다. 이는 창조의 아버지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구축해 나가길 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 준다. 물리적인 장소나 실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인간은 ‘관계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과 단절될 수 있다. 때로는 그분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가 정해두신 모든 규율은 불편하기만 하다. 그렇게 스스로 귀를 닫고 세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려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와 ‘관계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버지를 떠나 원하는 것을 하겠다는 우리의 자유의지 마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통치 아래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피조물의 자유는 창조주의 자유보다 결코 크지 않으며, 이는 결코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이 아닌 위로가 된다. 우리는 반드시 실수하고 넘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이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을 포함한 구약의 모든 인물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현실 속에서 마주한 문제나, 우리가 지은 죄보다도 훨씬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실수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하는 경우의 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지은 죄 마저도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성취하시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약속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된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그분의 약속이 사람의 노력에 달려 있다면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해서 아버지의 사랑이 좌절되는 것은 아니다. 실패와 시련마저도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 그리고 그분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위해 사용된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를 주는 약속이 어디 있겠는가? 이 영원한 언약과 그 언약을 지키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을 바라보며, 우리는 더욱 겸손의 태도를 갖춰야 한다. 내가 이룬 것처럼 보인 것들이 실제로는 나의 힘과 능력을 통한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언약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끄심을 묵상할 때에, 그것을 자칫 오해하여 본인의 능동성을 잃어버리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이끌어주실 것이니, 나는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으로 역사를 주도해 나가시는 동시에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심으로써 개인의 능동적인 선택과 결단이 그의 인생의 운명을 어느정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시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심으로써 우리가 그저 하나님이 정하신 길대로 걸어가는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점을 확증하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작은아들, 야곱을 생각해보라.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빼앗았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외국 땅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모진 고생을 했다. 그리고 거기서 평생 사랑할 짝을 만났고 자식들을 낳았으며 그 후손 가운데서 예수님이 태어났다. 야곱의 죄가 그를 최선이 아닌 플랜 B의 삶, 덜 좋은 삶으로 몰아넣지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모든 것이 그를 향한, 더 나아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야곱은 스스로 저지른 죄에 책임을 지지 않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대가로 수없이 많은 시련을 겪었다.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똑 같은 방식으로 그의 삼촌인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고, 심지어는 그의 아들들에게 마저 속임을 당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어김없이 주관하셨다. 야곱이 철저하게 대가를 치르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은 중요하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이 요구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 한번도 아무렇게나 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솔로몬의 잠언은 도덕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그리고 여호와께로 속히 돌아오라고 호소한다.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리고 순종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분명하게 가르친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시면서 어리석고 악한 행동의 결과로 고난을 겪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셨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의 행동이 그가 겪는 고난의 일부분과 분명히 연결되며, 동시에 개인의 지혜와 의지를 이용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갈수록 그것으로부터 오는 상급이 분명히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해주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크고 작은 행동에 의미가 부여되었음을, 그리고 아버지의 통치를 과신하여 일부로 집을 떠나 방탕한 삶을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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