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 살아간다는 것

작은 아들 2

by 아로새김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누가복음 15:13-14)


둘째 아들은 결국 집을 떠났다. 아버지가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는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 돈을 어디에서 모조리 탕진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여기서의 ‘집 밖’으로 떠난다는 표현을 단순히 오랫동안 살아온 고향 땅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가출, 즉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단절된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관점을 고려해 본다면, 비유 속의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 어떤 삶을 살아갔을지, 왜 그는 그의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는지 그려볼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사랑하고 의지해왔던 누군가와 이별을 하게 되면, 우리는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외로움과 두려움을 강하게 느낀다. 이것은 아무래도 ‘절대적인 사랑’을 주던 존재가 곁에서 사라짐으로써 찾아오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동안 언제든지 나의 편이 되어 주었고, 나의 크고 작은 일들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며, 때로는 내가 실수하고 실패해도 여전히 나를 향한 사랑의 지지를 거두지 않던 부모님과 많은 형제자매들이 한순간에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그들의 응원과 도움의 손길이 끊어지자, 그 공허감 속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러한 절대적인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항상 조건적이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서로 간의 사랑의 정도가 바뀐다. 이는 동시에 나의 행동에 따라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 그들과 나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가 유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크고, 대단히 매력적이며, 이런저런 약속들을 남발하는 잡음을 듣게 된다. 그러한 잡음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당장 나가서 네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걸 보여줘. 너의 가치를 증명해봐.” 이것이 세상에서 사랑받는 방법이다.


세상은 ‘증명’을 요구한다. 하나같이 성공하고, 인기를 얻고, 권력을 잡아서 사랑받을 만한 존재임을 증명하라고 속삭인다. 현실 앞에 선 우리에게는 그 어떤 목소리보다 증명을 요구하는 면접관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린다. “단단히 작심하고 힘든 일을 해내서 일정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속삭인다. 자신과 다른 이들로부터 사랑받기에 합당한 인간임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계속 몰아친다.”


‘사랑 그 자체로서의 사랑’이 점점 사라져간다. 세상은 사랑은 동전의 앞면에 불과할뿐, 그 뒷면에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죽하면 세상의 위대한 교훈 중 하나가 ‘아무런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반드시 의심하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가 되었겠는가. 이 말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논하기보다는, 그저 이 세상이 이러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깊은 상처와 슬픔의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누군가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해도 화가 난다. 별것 아닌 거절에도 깊이 상심한다. 의미 없는 칭찬에 화색이 돈다. 사소한 성공에 흥분한다. 아주 작은 일들에 들뜨기도 하고 구덩이에 처박히기도 한다. 그런 우리의 마음은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그만 나룻배와 같아서 물결이 일렁이는 대로 고스란히 흔들린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바로잡고 자칫 뒤집혀 침몰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모조리 쏟아붓다 보니, 이제는 삶 자체가 생존이자 경쟁이 돼버렸다.[1]


그런 괴로운 인생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온 땅을 누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우리 삶 가운데서 잊혀진지 오래다.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데, 혹여나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고, 욕하고, 따돌리고, 무시하고, 구박하고, 죽일까봐 겁이 난 나머지 끊임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략을 세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완전한 자아실현을 위해 계속해서 사랑받아야 하고 그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어 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향해 쉴 새 없이 “나 사랑해? 정말 사랑하는 거지?”라고 묻는다. 그리고 세상은 대답한다. “물론이지. 잘생기고 예쁘다면, 똑똑하다면, 돈이 많다면 사랑하지. 일류 대학교를 나왔다면, 좋은 직장에 다닌다면, 멋진 친구들과 사귄다면 사랑하고말고. 일을 잘 하고, 상품을 많이 팔고, 물건을 많이 사면 사랑하다뿐이겠어?” 세상의 사랑에는 수많은 “…한다면”이 숨어 있다.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조건들을 일일이 다 채운다는건 불가능한 일이므로 “…한다면”들은 결국 그들의 숨을 조이는 올가미가 된다.[2]


집을 떠난 작은아들이 가져갔던 그 많던 돈은 다 어디갔는가? 아무래도 사랑받기 위해 모두 사용하지 않았을까? 집을 떠난 그는 이제 그를 향한 완전한 사랑, 다시 말하자면 그의 능력이나 행위에 상관 없이 그를 절대적으로 사랑해주던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래서, 그 빈 공간, 아버지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던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해 모두 사용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저마다의 속셈을 채울 수 있을 때까지만이었다. 빈털터리가 되고, 나눠줄 선물보따리가 떨어지자, 세상이 그와 관계를 이어갈 이유 또한 사라졌다. 추락을 거듭한 작은아들은 돼지를 치는 가장 비참한 위치까지 내려간다.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을 자격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을 내어 일하는가?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것으로 무엇을 얻기를 원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당신은 가지지 못한 것을 취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진정 그 살아가는 여정 자체를 기쁨 안에서 누리고 있는가? 당신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당신의 가슴 한 가운데에 새겨진 가치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1]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향”, pp.79

[2] 같은 책, pp.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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