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노동의 종말 AI 시대의 ‘진짜 노동’

by Ehecatl

데니스 뇌르마르크의 『가짜노동』을 읽고 나서, 사무실에서 반복되는 많은 장면들이 더 이상 “그냥 회사생활”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일을 한다’는 감각보다 ‘일을 하고 있다고 증명한다’는 감각이 더 강한 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가짜노동』이 던진 문제의식 위에, 온프레미스 AI와 RAG가 현실로 들어오는 순간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남는지를 겹쳐 보며, AI 시대의 “진짜 노동”을 선언이 아니라 설계의 관점에서 다시 정의하려 한다.


지금, 여기의 가짜노동: ‘바쁨’을 연기하게 되는 구조

사무실의 많은 업무는 무대 위 성과가 아니라 무대 뒤 증빙을 생산하는 데 집중된다. 며칠씩 공들여 만든 현황조사와 시장분석 보고서가, 신제품이 출시될 즈음이면 아무도 열어보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그럼에도 조직은 이를 멈추지 않는다. 보고서가 ‘결정에 기여해서’가 아니라, 보고서가 있어야 “일하고 있다”는 명분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원래 필요한 것은 “이 일이 왜 필요한가, 어떤 리스크를 감수할 것인가”를 따져 방향을 정하는 결정의 합리성이다. 그런데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순간 “일단 움직여야 한다, 바쁘게 보여야 한다”는 행동의 합리성이 정당성이 된다. 신중한 질문이 사라지고, 움직임 자체가 가치처럼 포장되는 순간 가짜노동은 쉽게 태어난다. 불확실성은 줄지 않는데, 바쁨은 늘어난다.

여기에 파킨슨의 법칙이 더해진다. 업무는 주어진 시간을 채우기 위해 늘어난다. 시간 중심으로 평가받는 조직일수록, 효율이 높아질수록 가짜노동이 늘어나는 역설이 생긴다.


AI(On-premise/RAG)라는 ‘진실의 거울’: 숙련의 독점이 풀리는 순간

온프레미스 AI와 RAG는 사내 데이터(품의서, 예산, 정책, 과거 의사결정 기록)를 기반으로 초안을 몇 초~몇 분 안에 만들어낸다. 그동안 ‘몇 날 며칠’이 걸리던 업무의 성격이 바뀐다.

핵심은 생산성 향상보다 노출이다.
AI는 묻는다. 누가 가치 있는 결정을 만들었는가. 누가 절차를 복제했는가. 누가 시간을 태우며 바쁨을 유지했는가. AI가 2시간에 끝낼 수 있는 일을 사람이 8시간 동안 붙잡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성실로 읽히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 AI는 가짜노동을 끝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짜노동을 가장 싸게 대량 생산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보고서를 5분에 만들 수 있게 되면, 조직이 “그럼 매일 5종을 가져오라”고 요구할 유혹이 생긴다. 따라서 AI 도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운영규칙(회의·보고·결정 구조)이 함께 바뀌지 않으면, 가짜노동은 “느린 가짜노동”에서 “초고속 가짜노동”으로 변형된다.


기술과 제도의 충돌: 한국에서는 “자르기”보다 “압축”이 합리적이 된다

기술은 노동의 필요성을 줄이는데, 제도와 현실은 고용구조를 단숨에 바꾸지 못한다. 그 공백을 조직이 메우는 방식은 대개 ‘절차의 팽창’이다. 더 촘촘한 보고, 더 많은 회의, 더 복잡한 결재 라인이 그것이다.

여기에 한국적 특수성이 하나 더 얹힌다. 한국에서 정리해고(경영상 해고)는 요건이 엄격하고(긴박한 경영상 필요, 해고 회피 노력, 합리적 기준, 성실한 협의 등이 요구된다), 절차·실체 요건을 모두 갖추지 못하면 분쟁 리스크가 커진다.

즉, AI로 인해 인력이 남는다고 해서 “자르면 된다”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경영진이 실제로 마주하는 선택지는 더 노골적이다.

어차피 법·분쟁 리스크 때문에 쉽게 자르기 어렵다면 남는 시간을 ‘가짜노동’으로 태우게 두어 조직을 좀비화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전략적으로 압축하고, 회복된 에너지로 진짜 노동의 농도를 높일 것인가

이것이 경영진에게 던져야 할, 다소 이기적이지만 현실적인 선택지다.


새로운 사회 계약: 노동의 기준이 ‘시간’에서 ‘책임’으로 옮겨간다

AI 시대에 반복적이고 문서화 가능한 일은 AI로 내려간다. 남는 것은 결국 판단·예외·책임이다. 다만 이 책임을 모든 직원에게 요구하는 구조는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핵심은 “전 직원 전략가화”가 아니라, 책임선(누가 무엇을 승인하고 책임지는가)을 어디에 둘지 재설계하는 일이다.

조직을 세 층으로 나누면 구조가 선명해진다.

Automation Layer: 문서 작성, 요약, 검색, 초안 생성은 AI가 수행한다.

Judgment Layer: 우선순위, 예외 판단, 이해상충 조정, 트레이드오프 선택은 사람이 한다.

Accountability Layer: 최종 승인, 책임 인수, 감사 대응, 거버넌스 보증은 제한된 레이어가 맡는다.


4-1. 임금 유지형 근로시간 단축(100-80-100)을 ‘복지’가 아니라 ‘회피 동기’로 설계한다

100-80-100은 다음을 뜻한다.

100(임금): 급여는 100% 유지한다

80(시간): 근로시간은 80%로 줄인다(주 40→32시간, 주 5→주 4일 등)

100(성과): 성과/산출은 100%를 유지한다(목표는 낮추지 않는다)

이 모델의 요지는 “덜 일하고 덜 받자”가 아니다. AI로 줄어든 시간을 가짜노동으로 재팽창시키지 않기 위한 시간 구조 설계다.

여기서 설득 방식이 중요하다. “직원이 행복해진다”는 낙관론은 약하다. 경영진을 움직이는 것은 대개 회피 동기, 즉 “이렇게 안 하면 망한다”는 공포다.


핵심 인재 이탈의 매몰비용

AI가 보편화될수록, ‘진짜 가치’를 만드는 고성과자는 가짜노동의 공허함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떠난다. 핵심 인재 1명 이탈은 채용+온보딩+공백 비용으로 크게 발생한다(현장에서는 연봉의 1.5~2배라는 프레임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편이 설득력이 좋다). 이 관점에서 주 4일제는 ‘복지’가 아니라 가장 저렴한 황금 수갑이 된다.


관리 비용의 역설
가짜노동을 유지하는 데도 돈이 든다. 불필요한 회의로 소모되는 승인권자 시간, 공간·전기·IT 인프라, 결재 라인 유지 비용을 합치면 “근로시간 20% 단축”보다 비싸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일을 시키기 위해 ‘일하는 척을 관리하는 비용’을 지불한다. 이 쓰레기 비용을 도려내고 급여를 유지하는 편이 재무적으로 이득이다”라는 논리가 먹힌다.


다만 100-80-100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성과 100’을 누가 정의하느냐다. 기준선이 계속 올라가면(‘moving goalpost’) 100-80-100은 “32시간에 120%”가 되고, 노동은 고밀도화되어 번아웃을 만든다. 그래서 100-80-100은 슬로건이 아니라 합의 구조가 필요하다.


성과 기준선(Baseline)을 고정한다(최근 6~12개월 평균 산출 기준).

기준 재설정 주기를 제한한다(분기/반기 단위로만 조정한다).

업무량 상한(WIP 제한)을 둔다(요청이 늘어나는 속도를 막는다).

번아웃 지표를 운영지표로 함께 본다(이탈률, 병가, 초과근무 등).


4-2. 노동 가치를 다시 판단한다: 인사팀장의 ‘사건 기반’ 사례(바로 계산 가능)

가치의 재정의는 추상적 문구가 아니라 사건(event)으로 증명될 때 설득력이 생긴다. 인사팀장이 다루는 사건은 실제 비용과 시간이 발생하고, 전후 비교가 가능하다. 다만 단일 KPI로 몰아가면 굿하트의 법칙이 작동하므로, 반드시 쌍(pair) 지표 + 샘플링 감사(Audit)를 세트로 둔다.


사건 1) 수습 부적격/저성과자 분쟁 1건을 줄인다

분쟁 1건이 발생할 때 최소비용을 이렇게 잡을 수 있다(예시).

내부 대응 시간: HR 40h + 팀장 30h + 임원 10h = 80h

외부 비용(노무/법률): 500만 원

조직 손실(사기 저하·후속 대응 등 보수적으로): 200만 원

시간단가 5만 원 가정: 80h × 5만 = 400만 원
→ 분쟁 1건 최소비용 = 1,100만 원

기존 연 3건 → 개선 후 연 1건이면
절감액은 (3-1) × 1,100만 = 2,200만 원/년이 된다.

여기서 “분쟁 0건”을 목표로 삼으면 은폐·회피가 생긴다. 그래서 다음을 같이 본다.
분쟁 건수 ↓ + 조치의 정당성/재발률/피해자 보호 품질 ↑ (그리고 무작위 케이스 품질 감사).

사건 2) 직장 내 괴롭힘/윤리 이슈에서 리드타임과 재발을 줄인다

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접수하거나 사실을 인지한 경우 지체 없이 객관적 조사를 실시하고, 필요한 보호조치를 해야 한다.
즉 이것은 “문화”가 아니라 법적 운영 과제다.

사건이 길어지면 비용이 된다(예시).
관련 팀 10명이 2주(10영업일) 동안 하루 1시간씩 집중력을 잃으면
10명 × 10일 × 1h = 100h 손실 → 시간단가 5만 원이면 500만 원이다.

리드타임 14일→5일, 재발률 연 3건→1건으로 줄어들면, 그 자체가 비용 절감이 된다.


사건 3) 보상·성과체계 실패로 핵심 인재 1명 이탈을 막는다

핵심 인재 1명이 이탈할 때(보수적 예시)

채용 비용: 500만 원

공백 3개월(월 700만): 700×3 = 2,100만 원

온보딩 3개월 생산성 50% 손실: 700×3×50% = 1,050만 원
→ 최소 합계 3,650만 원/명

즉 “문서”가 아니라, 이탈률·오퍼 수락률·평가 불복 건수 같은 사건 지표가 움직이면 진짜 노동이 된다.


관리자의 진짜 노동: 한국에서는 ‘책임’이 곧 ‘형사 리스크’가 된다

“관리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문장은 한국에서 더 강하게 읽힌다. 성과만이 아니라 법적 안전도 책임지기 때문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안전보건 확보의무 위반으로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경영책임자 등이 처벌될 수 있는 구조를 둔다.

직장 내 괴롭힘도 사용자의 조사·보호 조치 의무가 법에 명시돼 있다.

그리고 여기서 ISO 37301이 연결된다. ISO 37301은 컴플라이언스 경영시스템(CMS)을 수립·운영·개선하기 위한 국제표준이다.
AI가 내놓은 결과물이 법적·윤리적 가이드라인을 넘지 않았는지, 데이터가 조작되지 않았는지, 프로세스가 작동하는지 보증하는 것이 관리자의 진짜 노동이 된다. 사고가 터졌을 때 “AI가 시켰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결국 관리자는 AI라는 날 선 칼을 휘두를 때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시스템적 안전장치(ISO 등)를 설계하고, 그 작동 여부를 직을 걸고 보증해야 한다.


보완된 논리의 결론: “전략적 압축과 보호”가 한국형 해법이 된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AI 도입으로 가짜노동은 사라질 운명인데, 한국의 법 제도는 “잉여 인력의 즉시 해고”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그 결과 해고 못 하는 인력이 가짜노동으로 시간을 태우면 조직의 좀비화가 진행된다.

그래서 주 4일제(100-80-100)는 복지가 아니라, 자를 수 없는 인력의 노동 밀도를 강제로 높여 생산성을 보존하고, 가짜노동 관리 비용을 절감하는 경영 결단이 된다. 동시에 관리자는 남는 시간 동안 AI가 놓치는 법적·윤리적 리스크를 필터링하는 거버넌스 설계에 집중한다. 이 영역이 고부가가치 노동이 된다.


비판적 최종 점검: “그럼 임금을 80%로 깎고 AI를 더 사면?”에 대한 답

경영진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80%만 일하면 월급도 80%로 깎고, 남는 돈으로 AI 솔루션을 더 사겠다.”

여기서 반박은 감정이 아니라 메커니즘으로 해야 한다.

임금을 깎는 순간 고성과자는 먼저 떠난다(대체 비용이 크다).

남는 사람은 조용한 퇴직(quiet quitting)으로 합리화한다.

그리고 AI 시대의 최악은, 사람이 AI를 이용해 완벽해 보이는 가짜 결과물로 회사를 속이는 상황이다.
결국 회사가 사고 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AI를 다루는 인간의 정직한 판단력과 책임이다. 그 핵심 자산을 훼손하면, AI는 비용 절감 도구가 아니라 조직 붕괴 촉매가 된다.


맺음말: AI 도입이 아니라 ‘운영체제 교체’를 해야 한다

AI는 가짜노동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가짜노동을 초고속으로 증식시키는 엔진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될지는 기술이 아니라 조직의 운영체제(회의·보고·결정·책임·평가 규칙)가 결정한다.

그래서 결론은 단순하다.

가짜노동을 인정한다.

반복 가능한 업무는 AI에 위임한다.

인간은 판단·예외·책임·윤리 설계에 집중한다.

100-80-100은 슬로건이 아니라 합의 구조로 설계한다(기준선 고정, 재설정 주기 제한, 업무량 상한, 번아웃 지표).

사건 지표는 단일 목표가 아니라 쌍 지표와 감사로 해킹을 방지한다.

AI 도입과 동시에 회의·보고 상한, 결정 로그 같은 운영규칙을 도입해 ‘초고속 가짜노동’을 막는다.

AI는 부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인간도 무의미한 긍정, 즉 가짜노동을 더 만드는 긍정을 멈춰야 한다. AI 시대의 진짜 노동은 더 오래 일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히 결정하고 더 분명하게 책임지는 방식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신입사원이였을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