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인간을 이어주는 편지

뮤지컬 <팬레터> 10주년 기념 공연 리뷰

by 도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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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 주인공 세훈은 세상을 떠난 작가 히카루의 마지막 소설이 출간되며 그녀의 진짜 정체도 밝혀진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이를 막기 위해 세훈은 유치장에 있는 소설가 이윤을 찾아가 히카루의 유고집 출간을 막아달라 부탁하지만 이윤은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세훈은 히카루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하는데...' 여기까지가 뮤지컬 팬레터의 시놉시스다. 오랜만에 뮤지컬을 보게 되어 설레는 마음에 어떠한 스포(시놉시스도 읽지 않았다) 없이 공연장을 향했다. 10주년을 맞이한 작품인 만큼 공연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공연장 불이 꺼지고 관객들은 1930년대 경성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 문인들의 사랑과 예술을 엿볼 수 있었다.


칠인회라는 작중 단체는 김유정, 이상 등 1930년대에 실제로 활동했던 당대 문인들의 모임안 '구인회'의 일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칠인회 중 한 명인 천재 소설가 김해진과 김해진을 동경하는 작가 지망생 정세훈, 김해진의 뮤즈이자 비밀스러운 작가 히카루 3인은 팬레터를 매개로 얽히고 섥힌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던 정세훈은 평소 동경하던 소설가 김해진에게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편지를 보낸다. '선생이시여, 슬픔을 안고 계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슬픔을 나누어 주소서'라고 적힌 진심 가득한 편지를 읽으며 김해진은 히카루에게 큰 힘을 얻고 히카루는 김해진의 뮤즈가 된다. 세훈은 유학을 강요하는 집에서 나와 칠인회의 급사로 일하게 되며 신입 멤버가 된 김해진을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


세훈은 자기 생각보다 히카루를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김해진을 보며 혼란스러워 한다. 처음에는 진실을 알게 되면 해진이 실망할 것 같아 정체를 밝히지 않고 편지를 보내지만,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짓에 집어삼켜져 직접 편지를 쓰고 본인이 아닌 척 히카루의 편지를 건네는 세훈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진다. 칠인회의 또다른 멤버 중 하나인 소설가 이윤은 칠인회의 분위기 메이커임과 동시에 염세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문인으로서 같은 폐결핵 환자인 해진을 걱정해 히카루의 숨겨진 정체를 파헤치려 애쓰는 인물이다. 정체가 발각할 우려가 있자 히카루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해진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도록 종용한다. 그렇게 히카루와 해진의 절절함을 넘어 광기 어린 문학적 소통이 이어진다. 하지만 영원한 거짓은 없는 법. 결국 정체를 밝힌 세훈은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쳤다는 사실에 좌절하지만 해진이 죽고 난 뒤 해진의 마지막 답장을 뒤늦게 접하고 용서 받는다.


일련의 서사를 함께 따라가며 글의 영향력에 생각하게 됐다. 일면식도 없던 두 인물이 편지를 통해 가까워지고, 일본어가 아닌 우리말로 글을 쓰며 일제강점에 저항한다. 히카루의 글을 통해 해진의 고독은 옅어졌으며 세훈은 글을 통해 해진을 향한 동경 어린 마음을 표현하고 히카루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며 숨겨져 있는 자신의 야망을 뽐낸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억압돼 있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 글을 쓴다. 추상적이었던 생각은 문자로 표현되며 또렷해진다. 가끔 부모님께 편지를 쓸 때 부모님을 향한 애틋함이 더 커지는 것처럼 글에는 힘이 있다. 뮤지컬 팬레터는 글의 힘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라 마음이 더 갔다.


또 다른 좋았던 점은 그림자를 활용한 연출이었다. 세훈은 남성, 히카루는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만큼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던 나에게 둘의 관계를 처음부터 알아차리긴 어려웠다. 남매인가 싶었던 관계가 시간이 흐르자 세훈의 또다른 자아라는 것을 깨닫고 세훈이 연기할 때 건물 배경 뒤로 히카루의 그림자가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됐다. 뮤지컬 내내 세훈과 히카루는 거울처럼 행동하고 표현된다. 조명과 그림자로 둘의 관계를 그려낸 게 매우 흥미로웠다. 뮤지컬은 공간이 제한적인 만큼 연출적인 부분이 눈에 띄기는 어렵지 않을까 했던 내 생각을 뒤집는 모습이었다. 뮤지컬 넘버 역시 칠인회, 뮤즈, 사랑과 야망 등 시대상과 문인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가사로 이뤄져 있어 좋았다. 격정적인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뮤지컬 팬레터는 탁월한 선택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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