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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놓친 기회 1

by 태리우스


군대 훈련소에서 첫날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엄마, 아빠와 눈물의 이별식을 하고 우린 어디론가로 우르를 몰려갔다. 연병장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운동장을 돌아 건물 뒤쪽이었다. 나는 키가 작아서 앞쪽에 서있었다. 초중고 운동장 조회시간처럼 분단을 나눈 후 줄을 서있었다. 그때 어떤 여자 군인이 나타났다. 장교 같았다. 그 여자가 내 옆분단 앞에 서서 말했다.


"장군 운전병을 뽑으려고 한다. 운전면허 있고 서울 광진구에 살고, 4년제 대학 다니는 사람 있나?"


바로 나였다. 나는 운전면허가 있었고 서울 광진구에 살았고, 지방대였고 1학년때 학사경고를 2번이나 먹었지만 4년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얼마나 소심했었는지, 그 여군이 내가 있던 분단이 아닌 옆 분단 앞에서 말했기 때문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발 내 분단 앞에 와서 말해주세요. 그러면 나라고 말할게요.'


하지만 그 여군은 여기저기를 둘러본 후 그런 훈련병이 없는 줄 알고 돌아섰다. 나는 그제라도 손을 들고 나라고 소리쳤어야 했다. 하지만 나서는 걸 극도로 부끄러워했고 기회를 움켜잡지 못하는 성격 탓에 내게 날아온 군생활의 황금 같은 기회를 훨훨 날려 보냈다. 나는 그 여군이 내 앞에 와서 말해주길 바랐다. 11시 방향에 바로 내 옆 분단 앞에 있는 그 군인에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장군 운전병이면 대한민국 군인 중에서도 0.0001% 땡보 중에 땡보가 아닐까? 땡보는 편한 보직의 군인을 말하는 군대 은어다. 당시 복무기간이 2년 2개월이었는데, 만약 장군 운전병이 되었다면, 나는 광진구 집에서 출퇴근을 하며 유치원생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듯 별을 단 장군을 안전하게 이동시켜 주는 운전기사를 했을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기회를 놓친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 기회를 놓치고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논산훈련소에서 지긋지긋한 훈련을 받았다. 훈련기간 중에 체력테스트를 하는 날이 있었다. 군대 훈련소에서 하는 체력테스트를 열심히 하면 안 된다. 왜냐고? 체력이 좋은 훈련병들을 추려서 전방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건 아니지만 내 추측이 맞을 거다. 나는 운동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날 체력테스트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아마도 체력 상위클래스에 랭크되었던 것 같다. 논산훈련소에서 기초훈련을 받고 전방으로 보내질 특별그룹을 모아서 6주 훈련을 더 받았다.

일반 보병 중에서도 무거운 무기들을 들고 다녀야 하는 중화기부대에 가기 위한 후반기 교육을 받아야했기 때문이다. 일반 보병보다 더 무거운 무기를 들어야 하는 군인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이겠는가? 단순하게 체력 아니었겠는가? 그놈의 체력테스트에 최선을 다한 결과가 확실하다. 나의 주특기는 바주카포처럼 생긴 90mm 무반동총이었다. 그렇게

논산훈련소에서 몇 주를 더 훈련받았다.


그때 잊지 못할 일이 있다. 내가 하나뿐이 없는 양치질 칫솔을 잃어버린 것이다. 2주 정도 양치질을 하지 못했다. 훈련병에게는 칫솔이 두 개 주어진다. 하나는 치아를 닦으라고 하나는 군화를 닦으라고, 2주동안 양치질을 못하니 시커면 구두약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칫솔로라도 이빨을 칫솔질하고 싶은 충동이느껴졌다. 서울에 살던 문명인으로서 2주 이상 양치질을 안 하면 얼마나 괴로운지 그때 처음 알았다. 입안이 모래로 코팅되는 듯한 텁텁함과 싱크대가 꽉 막힌듯한 답답함으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신경치료를 받았던 어금니에 문제가 생겼다.


훈련병은 언제나 배가 심하게 고프다. 그런데 여유 있게 밥을 먹을 시간도 안 준다. 여자들은 모르지만 훈련소에는 젓가락이 없다. 숟가락만 준다. 그나마 포크숟가락이 있으면 양반이다. 숟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퍼먹고 쑤셔 넣고 삼키고 고체를 액체 마시듯 배에 채워 넣어야 한다. 아주 빠르게, 하지만 어금니 통증이 너무 심해서 밥 먹는 게 고통스러웠다. 전기충격기로 어금니를 지지듯 고통스러운 찌릿함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결국 훈련소 기간 중에 군 병원에 갔다.


군 병원에 있는 치과에 가서 신경치료를 했던 어금니의 금으로 된 크라운을 걷어냈다. 치과 군의관 옆에서 일을 보조하던 의무병이 경악했다.

"윽! 냄새!"

크라운 안쪽이 심하게 썩어서 지독한 하수구 냄새가 났던 것 같다. 크라운을 빼고 신경치료를 임시로 다시 해줬다. 어금니가 안 아프니 정말이지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행복한 마음에 치과를 나왔다. 그런데 내가 나오자 얼마뒤 의무병이 내 어금니를 씌워있던 크라운을 돌려주려는 듯 나를 찾았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그들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고 갈길을 갔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금이 아깝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기억에 논산훈련소에서 12주를 보내고 또 전방부대로 가기 전에 2주를 보내고 드디어 자대배치를 받았다. 12사단 을지부대였다. 전방에 있는 부대들이 유명해서 그 부대들을 메이커부대라고 했다. 12사단도 메이커 부대 중에 하나였지만 그래도 부드럽고 편한 이미지였다. 백골부대, 칠성부대, 백두산부대, 뇌종부대, 오뚝이부대, 이기자부대,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이 몰려오는 부대에 가지 않게 되어서 진심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자대배치를 받고 이등병 생활을 얼마간 하다. 최전방 철책 근무를 하기 위해 1년 동안 DMZ에 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힘든 데가 있고 편한 데가 있었는데, 나는 동기들 중에 가위, 바위, 보에 져서 정말이지 가고 싶지 않은 데 가게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탈영을 하고 싶었다. 탈영을 생각했다. 그래서 선임에게 말했다. 탈영을 하고 싶다고, 선임은 부대에 중사인지 상사인지에게 나에대해 말했다. DMZ로 떠나는 당일 극적으로 나는 가고 싶지 않은 소대가 아닌 내가 가고 싶었던 소대에 가게 되었다. 그렇게 DMZ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훈련소 첫날 내가 날아온 로또복권 같은 행운을 놓쳐서 생긴 일이었다. 만약 그때 내가 손을 들고일어나서 말했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제가 광진구에 살고 4년제 대학생입니다. 그리고 운전면허증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더라면.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에 눈물이 고인다.


PS. 사실 여기서 고백하지만 나는 운전면허를 16번 떨어졌다. 1년을 걸려서 운전면허를 땄다. 지금도 운전을 아주 잘하지 못해 운전하기 전에 언제나 기도를 한다. 장군 운전병이 안된 게 오히려 잘된 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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