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역시 푸르트뱅글러(이하 '푸뱅')이라는 걸 재확인해 준다.요샌 클렘페러랑 클라이버에 꽂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내 본진은 푸뱅이다.
베교 5번을 처음 제대로 감상한 게 중학생 때의 일인데,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충격과 전율로 범벅되었던 그때의 감상을 오염시키고 싶지 않아서 일부로 이 리코딩을 당분간 듣지 않았을 정도니까. 훗날 박찬욱 감독이 히치콕의 <현기증>을 처음 보고 그때의 전율을 잊지 않으려고 다시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일화를 전해 들었을 때, 푸르트뱅글러를 떠올리며 조용히 공감을 했었다.
이 연주는 푸뱅의 지휘 미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바로 '재현'이 아닌 '재창조'라는 그의 해석 미학 말이다. '재창조(Recreation)'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연주는 '신즉물주의'라는 기치 아래 악보의 음표들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 당연해진 20세기 후반 이후의 세태와는 정말로 구별된다. 물론 푸뱅이 활동하던 당대에도 어설픈 재해석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푸뱅의 경우가 천재적이었을 뿐이다. 그는 잠들어 있는 악보를 깨워 그가 올바른 형식과 구조를 갖춘 음악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여기서 '올바른 형식과 구조'라는 말이 중요하다. 푸뱅의 연주를 듣노라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아니라 '이렇게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내적 필연의 감각이 우뚝 선다. 악보를 재현하는 데 몰입하지 않으면서도 '필연적인' 연주로 들릴 수 있다니. 이쯤 되면 그가 음표들의 집합을 그대로 재현하는 토스카니니 식 지휘를 혐오했고 실제로 그런 지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이다. 잠시 그의 에세이 <음과 말>의 일부를 옮겨보자.
<음과 말> 중 일부
오늘날 그의 지휘는 독창적인 시도로 치부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자기변호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당당하다(그게 푸뱅의 매력). '올바른 단 하나의 해석'이라니, 21세기의 음악학자들이 듣는다면 까무러칠 주장이다. 하지만 괜찮다. 푸뱅이니까.
너무 덕후스런 발언이긴 하지만, 푸뱅은 아무리 찬양해도 도가 지나치지 않다. 음표들의 건조한 산술 집합이 아니라 유기적인 생명성을 지닌 하나의 음악 내러티브를 창조해 내는 그의 마력은 오늘날 누구도 재현해 내지 못하는 것 같다.
작곡가와 연주자 간, 그리고 무대와 객석 간 관계 맺기의 방식 자체가 달라져 버린 탓에 다시는 살아 있는 지휘자들에게서 푸뱅의 아우라 비슷한 것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슬퍼진다. 오늘도 그라모폰, 뉴욕 타임스 등지의 평론가들은 악보를 들이밀며 연주자들에게 호통을 친다. 그 때문에 표준화된, 너무나 표준화된 리코딩만으로 음반시장이 범벅이 되어 있다. 주자의 해석을 따르지 않으면 사문난적 취급받고 죽임 당하던 조선시대도 지금의 클래식 시장보다는 덜 근본주의적이었을 것.
생존한 사람 중에서 신즉물주의를 사실상 배격하는 연주자를 뽑자면 아마 이 정도뿐일 거다. 지휘자 중에선 쿠렌치스(Currentzis), 피아니스트 중에선 플레트뇨프(Pletnev). (더 있을 수도 있고 더 있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내가 잘 모르거나 싫어하는 경우다) 근데 쿠렌치스는 모차르트 레퀴엠을 빼면 대부분의 리코딩이 내 취향을 비껴간다(그렇다면 명단에서 빼야 맞겠지만 그의 모퀴엠은 내 취향 저격 그 자체라서..). 플레트네프는 내한 공연과 리코딩 작업을 더 자주 해줬으면 좋겠다. 플레트네프 하면 할 말이 참 많은데,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그는 '루바토의 마술사'다. 스크랴빈이 추구했던 러시안 신비주의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플레트뇨프를 통해 확인한다. 난 그의 젊었을 적의 분석적인 연주도 좋지만 근래의 환골탈태한 듯한 신비스러운 연주를 더 선호한다. 19년도에 조성진 연주회 세 곳을 쫓아다니다가(인천-서울-부산) 막판에 짬이 나서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플레트뇨프의 리스트 후기작 리사이틀을 들으러 간 일이 있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들으러 갔다가 플 옹의 마법적인 선율에 은총을 입었었다.
푸뱅 얘기를 하다가 플레트뇨프까지 와 버렸는데, 언젠가는 푸뱅의 독특성을 판가름 짓는 미학적 요인들을 포스팅해 보려 한다.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이 그랬던 것처럼 "재현이 아닌 재창조"라는 말을 일종의 줄기 단어로 삼고 거기에 해당되는 하위 요인들을 써 보면 되지 않을까. 예컨대, (1) 숨 막힐 듯한 시간적 긴장과 이완, (2) 느려 터진 것과는 구별되는 생생한 리듬, (3) (40년대 리코딩에서 부각되는) 폭력적인 악기의 사용, (4) 작곡가로서의 창작 배경, (5) 경과구에 대한 강조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