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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익 Feb 08. 2022

<트리스탄과 이졸데> - 사랑의 죽음


사랑을 가장 숭고하게 묘사한 음악극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택할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 작품의 각색된 줄거리, 음악, 연출 지시 사항 모든 것이 내 마음에 쏙 드는데, 그중에서도 피날레에 해당하는 'Mild und leise wie er lächelt(부드럽고 그윽하게 미소를 지으시네)'는 내 음악적 경외의 대상이다.


지휘: 카를로스 클라이버 / 소프라노: 마거릿 프라이스 / 오케스트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가사에서 드러나는 19세기 낭만주의의 핵심 테제인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이 지니는 숭고미, 그 메시지를 능가할 정도로 경이롭고 관능적인 음악이 극을 마무리다. '정(사랑)'과 '반(죽음)'의 만남은 둘 중 어느 하나의 승리로 귀결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영원한 결합으로 지양되는 것이다(이른바 음악적 변증법의 논리이다). 막바지에 다다라 음악은 더 이상 높아질 곳이 없을 정도로 부양되고, 이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이미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확약해주는 듯하다. 앞선 3시간 동안 파편적으로 제시되었던 영원불멸의 사랑을 상징하는 모티브들이 하나의 총체로 완성이 되는 순간이다.


위에 첨부한 것은 클라이버(Carlos Kleiber)프라이스(Margaret Price)가 협연한 버전인데, 오케스트라와 소프라노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옭아매어 최고도의 목적을 향해 달려갈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를 들려준다. 내가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자칭 바그네리안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Sviatoslav Richter) 역시 클라이버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두고 더 이상 훌륭한 연주는 없을 것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물론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agnler)의 관능적인 연주, 칼 뵘(Karl Bohm)의 폭력적이고 흥분된 연주 등도 결코 놓칠 수 없는 버전이다. 푸르트뱅글러야 워낙 믿고 듣는 천재이니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것이고, 칼 뵘의 경우는 고전 시대의 음악을 연주할 때와는 전혀 다른 폭력적인 방식으로 관악을 활용한다. 흥분의 끝에 다다라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


이 'Mild und Leise'가 워낙 유명한 곡이다 보니 오케스트라 버전, 피아노 독주 버전 등 다양한 형태로 편곡된 바 있는데,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편곡은 리스트(Franz Liszt)에 의해 번안된 피아노 독주 버전이다. 이 버전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에 의해 연주되어 온 수작이다. 피아노를 위해 번안되는 과정에서 원곡 본래의 참맛을 잃는 경우 혐오하던 리히터가 몇 안 되게 인정한 번안곡이기도 하다. 리히터의 연주 음원이 없기에 내가 가장 애청하는 졸탄 코치슈(Zoltan Kocsis)의 버전을 탑재해 본다.



루바토를 매우 유기적이고도 합목적적이게 활용한 것이 눈에 띈다. 결말부의 폭발하는 듯한 음형에서 옥타브를 분산하여 아르페지오처럼 들리게 연주한다는 점이 좋다. 대부분의 다른 피아니스트들은 이 부분을 정직하게 옥타브로 처리한 나머지 피아노의 메커니즘적인 단점(즉, '비브라토를 할 수 없다')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데, 코치슈는 영리하게도 아르페지오화된 옥타브를 활용하여 이러한 단점을 회피하고 오히려 피아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크레셴도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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