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포스팅("호로비츠의 루바토")에서 호로비츠 연주의 연대기별 주요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 1930년대 호로비츠의 괴력적인 기교와 관능적 힘(라흐마니노프),
- 1950년대 호로비츠의 탐미적인 루바토(쇼팽, 브람스),
- 60년대 호로비츠의 악마적인 왼손(스크리아빈),
- 80년대 호로비츠의 숭고한 음색(모차르트)
물론 이 특징이 그 시기에만 나타난다는 것은 아니고 그 시기에 '주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여기에 들어맞을 법한 리코딩을 시대별로 하나씩 소개한다.
참고가 될 만한 시대별 호로비츠의 연주
<1930년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op. 30
https://www.youtube.com/watch?v=9t3VZSx-Scs
내가 몹시 좋아하는 버전인데, 최근 유튜브에 리마스터링 된 버전이 탑재됐다. 세상 좋다.
1930년대에는 지금처럼 피아노 소리를 특별히 강조해서 녹음을 할 수 없었다. 모노 녹음이라 더욱 그럴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로비츠의 소리는 오케스트라를 뚫는다. 혹시 이 버전이 리마스터링 된 버전이라 그런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면 마찬가지로 유튜브에 업로드된 리마스터링 되지 않은 버전을 들어 보면 된다.
<1950년대> 브람스 왈츠 Op. 39 No. 15 (일명 '자장가')
https://www.youtube.com/watch?v=8Hux5fVzfJg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Dinu Lipatti)가 이 녹음을 듣고 '호로비츠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라고 칭송했다는 건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호로비츠의 마법 같은 리듬 및 음색 조절(이하 '루바토')이 진가를 발휘하는 건 이런 소품들에서다. 세상에는 위대한 작품은 준수하게 연주해도 소곡에서는 말아먹는 피아니스트들이 많은데(대표적으로 솔로몬 커트너 Solomon Cutner), 이 연주를 고려할 때 호로비츠는 결코 그런 연주자는 아니다. 오히려 적은 바와 같이 소곡에서야말로 그의 마력이 발휘되는 편이다. 피아노 초심자도 손쉽게 연주할 수 있는 작품을 이렇게까지 탐미적으로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호로비츠는, 랑랑(Lang Lang)처럼 무절제한 난봉꾼이 아니라, 너무나 지적으로 정련되고 제어된 탐미주의자다.
<1960년대> 스크랴빈 에튀드 Op. 8 No. 12
https://www.youtube.com/watch?v=7ClDFmFmr0k
호로비츠의 인기 동영상 중 하나. 작곡가 스크랴빈의 실제 연주를 들어 보고 이 연주를 들어본다면 호로비츠가 얼마나 해체적이고 파괴적인 연주를 들려주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악마적인 왼손이 구가해 내는 독특한 리듬이다. 이 곡은 본디 왼손을 위한 에튀드인지라 왼손 부분이 마치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끊이지 않고 연주되어야 한다. 숨 쉴 틈조차 갖지 못한 채 말을 타고 질주하는 사람처럼. 그런데 호로비츠는 이 악마적인 왼손을 강조하기 위해 스탑을 상당히 많이 걸고, 그 때문에 독창적인 리듬이 드러난다. 물론 호로비츠의 왼손 강조는 80년대에 와서 절정을 이루긴 하지만 60년대에서도 충분히 그 기원을 엿볼 수 있다.
<1980년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
https://www.youtube.com/watch?v=9LqdfjZYEVE
위태로워 보이는 마술사가 주술의 말을 읊조린다. 듣는 이는 그 문자들에 홀리는 듯하다. 30년대의 호로비츠가 보여주는 찬란한 기교는 더 이상 없지만 그보다 더욱 귀중한 음색이 남아 있다. 처음 이 리코딩을 들었을 때 그 슬픔의 깊이에 얼마나 전율을 느꼈는지 모른다.
<별첨>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3악장 (장송 행진곡)
https://www.youtube.com/watch?v=z97-4OhC1FE
호로비츠의 악마적인 아우라가 가장 잘 담긴 연주인데, 정확한 음원 출처와 리코딩 연대를 잘 모르겠다. 유튜브에 제시된 정보 상으로는 1932~1953년 사이에 녹음된 것일 텐데, 유튜브는 유독 클래식 음원에서 정보 표기를 잘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함부로 믿기는 곤란하다. 자세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연주의 특성만 관찰해 보면 60년대~80년대의 연주인 것으로 들린다.
보통의 장송 행진곡이 아니다. 악마적인 저음, 주제 간의 선명한 대비, 듣는 이를 말려 죽이다 못해 선동시키는 듯한 광기, 종말론적인 아우라.. 모든 게 완벽하다. 루빈스타인을 비롯한 표준적인 연주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악마적인 재능이 공포스러우리만치 서려 있다. 위대한 영웅의 죽음 앞에 모두가 하나 되어 집단적인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 있는 장면이 그대로 상상된다. 보통 인간의 죽음은 아니고 아마 신적인 존재의 죽음으로 느껴진다.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이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명은 이 곡의 감상평으로 딱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