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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익 Feb 28. 2022

우크라이나 침공과 클래식계 현황


미국 현지 기준 2월 25일,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카네기 홀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예정에 없던 빈 필 데뷔 공연을 했다.



조성진과 빈 필하모닉 (카네기 홀 리허설)


원래 공연을 맡았어야 할 러시아 출신 지휘자 발레리 게르게예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반대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아서 카네기 홀로부터 추방덕이다.


푸틴과 게르기예프
푸틴과 마추예프


왜 카네기 홀은 게르기예프와 마추예프의 공연을 불허했는가? 두 인물모두 푸틴을 공개 지지한 경력이 있는 '친(親) 푸틴' 인사이기 때문이다. 게르기예프는 푸틴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교류해 왔으며 대통령 선거에서 푸틴에 대한 공개 지지 연설을 했을 정도로 서로 막역한 사이다. 마추예프도 마찬가지다. 마추예프는 소치 올림픽 개막식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땀을 뻘뻘 흘리며 연주한 바 있다. '푸틴 러시아'가 공인한 인민 예술가라고나 할까.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에밀 길렐스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철회하지 않는 한, 이 둘을 비롯한 '친 푸틴' 성향의 연주자들이 자유 진영 국가에서 외면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특히 게르기예프 독일 뮌헨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재임 중인데, 현재 뮌헨 및 독일 중앙 정치인들로부터 융단폭격에 가까운 비판을 받고 있다. 독일 내 여론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그는 이 직장을 잃을 지도 모른다. 클래식 산업이 국가의 지원금으로 먹고사는 업계인 데다 독일 내에서 친 푸틴 음악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탓에 뮌헨 정치인들이 순순히 게르기예프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추가: 결국 그는 뮌헨 필의 상임직에서 퇴출되었고 에이전시에서도 퇴출당하게 되었다. 당분간 활동 무대가 마린스키 극장 등 러시아 영내로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상기한 문단까지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사실과 기대의 나열이었고, 이제부터 내 개인적인 소회를 적어 보려 한다.

 

1) 게르기예프의 지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의 커리어 위기가 별로 타격이 있지는 않다. 이참에 게르기예프가 절치부심하여 지휘 스타일에 변화를 주었으면 한다. '세계에서 가장 리허설을 적게 하기로 유명한 지휘자'라는 칭호가 뭐냐, 세상에. 아무리 그의 지휘 철학 자체가 현장성과 즉흥성을 중시한다고 하더라도 가뜩이나 이쑤시개 같이 작은 지휘봉만 휘두르며 눈빛으로 모든 지시를 하려는 그의 지휘는 디테일 상의 하자를 낳기 마련이다. 내겐 훨씬 나이 어린 쿠렌치스의 지휘가 훨씬 더 러시아적으로 들린다.


2) 데니스 마추예프는 근래 내가 좋아하게 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라 특히 아쉽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푸틴 지지 철회한다면 좋겠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리그의 '산왕의 궁전에서' 피아노 편곡 버전 연주에서 들을 수 있는 폭력적 사운드,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류시카' 피아노 편곡 버전 연주에서 들을 수 있는 찬란한 음색을 미루어 볼 때, 분명 마추예프는 오늘날 러시안 피아니즘의 자부심으로 우뚝 서 있다. 요즘 평론가들이 푸욱 빠져 있는 트리포노프보다는 마추예프가 탁월한 아니스트라고 나는 믿는 편이다. , 마추예프가 재즈를 연주하지 않눈다는 전제 하에.


3) 조성진에게행운이다. 조성진의 경우와 같이 업계에서는 주목할 만한 피아니스트로 소문이 나 있지만 유명 오케스트라들과의 지속적인 교류가 부재한 이들에게는 이번 침공이 (유감스러운 표현이지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유명 오케스트라들은 향후 수년 간의 협연 스케줄을 이미 다 짜 놓고서 운영을 하기 때문에 근래에 주목받은 신출내기 연주자들이 협연 기회를 갖기가 어렵다. 이번 카네기 홀의 경우와 같이 대타가 긴급히 필요한 경우가 되어야 비로소 이들 신출내기들이 겨우 협연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랑랑과 유자 왕은 각각 앙드레 와츠와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대타로 활약하다가 유명세를 얻은 경우이다. 러시아 출신 연주자들이 커리어 위기를 맞은 이 시점이 주는 잘 하지만 아직 순번을 기다려야  신출내기들이 활약할 기회임은 틀림없다. 이번 '러시안 공백기'를 통해 클래식계에 새로운 스타가 발굴되기를 기다린다.


4) 클래식 계의 '안티 푸틴' 운동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력이 약화될 수 있다. 클래식 계는 이미 유사한 상황을 겪은 바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중반을 지배하던 작곡가나 연주자들 중 상당수가 나치 협력 혐의와 연루된 탓에 2차 대전 이후에 자유 진영에서 연주 생활을 꾸리기 어려웠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나치 협력자들의 정치적 문제성과는 별개로, 이들의 음악성은 여전히 클래식 업계에서 존경 받있으며 자유 진영 음반사에서는 여전히 이들의 음반을 복각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자유 진영 국가에서 발간되는 수많은 음악 평론지에서는 여김 없이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알프레드 코르토, 헤르바르트 폰 카라얀 등 직간접적으로 나치에 협력한 이들의 연주가 세기의 명반으로 소개되고 극찬 받는다. 실력만 담보된다면 도덕적 결함은 용서 받는 것(일종의 "도덕적 운")이 클래식 업계의 관행이다 보니, 이번 사태를 통해 러시아 출신 연주자들이 잠깐 욕은 먹겠지만은, 그런 일이 그리 오래 가진 않으리라 본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철회하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이념과 논리도 결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오죽하면 성경 속 예수께서도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도 목숨을 걸고 지키는 안식일의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사람들을 살리셨겠는가. 예수께서 당신이 안식일에 치유 사역을 한 것을 두고 꾸짖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인자(人子)가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요, 안식일이 인자(人子)를 위해 있는 것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살리는 힘으로서 존재하여야 할 음악이 친 푸틴 예술가들의 정치 선전을 위해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늘에는 영광을, 땅에는 평화를.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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