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익 Feb 15. 2022

프란츠 슈레커의 <아득한 울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포스팅(https://brunch.co.kr/@ehrqkd1234/19)을 하면서 거기서 첼레스타가 이렇게 동화적인 감각을 연출할 수 있는 악기인 줄 미처 몰랐다고 쓴 바 있다. 아예 옮겨 보자.


극의 마무리 직전 첼레스타를 활용한 것과 그 이후의 익살스러운 마무리가 극의 음악 및 줄거리 전체를 신비스러운 동화로 완성시켜준다는 점. 첼레스타가 이렇게 사람을 눈물 나게 하는 악기인 줄 왜 몰랐을까. (그러고 보니, Richard Strauss의 후계자 격으로 여겨지는 Franz Schreker의 <Der Ferne Klang(아득한 울림)>에서도 마무리의 첼레스타가 모든 분위기를 영롱하면서도 신비스럽게 만들지 않던가) 마치 어렸을 적 눈이 빠져라 보았던 사랑스러운 동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여기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미처 들어보지 못했을 작곡가 Franz Schreker(프란츠 슈레커)를 언급하면서 그의 오페라 <Der Kerne Klang(아득한 울림)>에서도 첼레스타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 내기 위한 도구로써 합목적적으로 잘 쓰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첼레스타는 구글에 검색하면 어떤 소리를 내는 악기인지 바로 알 수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그런데 프란츠 슈레커는 처음 들어볼 수도 있겠다. 당장 나도 피아니스트 리히터의 생애사를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이름조차 몰랐을 사람이니 당연하다.


프란츠 슈레커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출처: Wikipedia).


프란츠 슈레커 (Franz Schreker, 1878년 3월 23일 모나코 ~ 1934년 3월 21일 베를린)는 오스트리아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그리고 음악교육가이다.

오페라의 작곡에 가장 비중을 두었으며,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그리고 신즉물주의가 혼합된 미학적인 다양성이 돋보이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와 더불어 실험적인 음색, 「확장된 조성」 기법, 그리고 종합예술 개념을 20세기 음악계에 선보였다. 생존 당시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이 높아, 1920년대에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 다음으로 중요한 오페라 작곡가로 다루어질 정도였으며, 그의 오페라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보다 자주 공연되기도 했다.

 슈레커는 1920년대 후반부터 독일국가사회주의 정치인들의 문화정책의 탄압 대상이 되었고, 국가사회주의 독재정권이 수립되고서 그의 작품은 퇴폐 예술로 선정되어 1933년 이후에는 거의 잊혔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그의 작품은 다시 관심을 얻기 시작하였으며 일종의 슈레커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출처가 위키피디아이긴 하지만 나름 잘 요약된 것 같아서 긁어 왔다. 요약하자면, 그는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뒤를 잇는 독일 오페라 계보의 적자로 대우받았을 만큼 명성 있는 작곡가였으나 정치인들에 의해 퇴폐 예술로 낙인찍혀서 졸지에 무명이 되어 버린 작곡가다. 1970년대 이후 다시 관심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메이저리티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들이 오늘날에도 비록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 있지는 못하더라도 그 중요성은 음악계에서 널리 공인되고 있다는 점과 비교했을 때, 슈레커의 처지는 참으로 딱하다.


그러나 슈레커가 아예 잊히지는 않았다. 그의 대표작 <아득한 울림(Der Ferne Klang)>은 오페라의 모습을 갖춘 채 극장에 올라가는 일은 없었지만 그 악보를 갖고 있는 극소수에 의해 은밀히 전해 내려왔다. 이 '극소수' 중에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사람이자 내가 가장 경외하는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Sviatoslav Richter)가 있다. 리히터는 모두가 슈레커의 이름을 잊었을 때에도 꾸준히 그의 작품을 기억해 온 사람이다. 브뤼노 몽생종이 리히터를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The Enigma>에서 리히터는 초반부에서 거의 몇 분을 할애해 가며 이 작품이 어렸던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감이 되어 주었는지를 설명한다. 자신이 만일 작곡을 했다면 바로 그런 곡을 작곡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경외를 담아 말한다. 요지는 이러하다. 리히터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를 공부한 피아니스트였는데 그의 친구가 바로 당대의 주목받던 작곡가 프란츠 슈레커였던 것이다. 리히터의 아버지는 무수히 많은 악보들을 리히터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그 선물 목록에는 훗날 대중에게 잊힌 이 <아득한 울림>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리히터는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온갖 악보들을 피아노로 연주해가며 인생 초반기에 음악적 감수성을 키워 왔는데, 그랬던 그에게 가장 감명 깊게 와닿았던 곡 중 하나가 바로 이 <아득한 울림>이었다. 오페라로 상연되지 않았지만 그는 피아노에서 자신의 특유의 톤으로 수없이 이 곡을 연주해 보고 그 관현악적 음향을 상상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슈레커는 나치 시절에 탄압받은 작곡가들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부활한다. 그 덕분에 리히터는 죽기 전에 이 곡을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이 연주한 녹음본을 접해 들을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 연주는 리히터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리히터의 일화는 여기서 각설하고,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리히터는 게르기에프가 표현한 대로 러시아 음악의 레퍼토리를 거의 다 꿰고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접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과거와 당대의 음악을 꿰고 있던 천재이다. 둘째, 슈레커는 오늘 대중들에게 잊힌 탓에 그 중요성이 간과되지만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뒤를 이어 독일 음악이 어떤 변천사를 거쳤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작곡가이다. 셋째, 이 작품도 듣기에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면에서 리히터의 구미를 당겼던 것일지가 다들 궁금할 텐데, 그 자세한 부분까지는 내가 분석하기가 어렵고, 이 작품의 음악적 형식과 골격이 어떻게 생겼는지 등 이론적인 관심이 생기는 사람은 구글에 이 작품의 이름을 검색하면 여러 가지 논문 또는 분석 글들이 검색되므로 검색해 보기 바란다.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느꼈던 바 중 특징적인 것을 하나 꼽자면, 이 곡의 음악 어법이 꽤나 '할리우드 영화 음악의 상위 호환 버전' 같이 느껴질 때가 잦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여기에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역사적 배경이 존재한다. 실제로 유럽(특히 독일-오스트리아 문화권)에서 위대한 작곡가들의 후예로 훈련받은 작곡가들 중 상당수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오면서 작곡으로 밥벌이를 하기 위해 할리우드에 취업을 한 바 있다. 이들이 할리우드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면서 바그너,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독일-오스트리아의 음악적 성향이 자연스레 할리우드의 음악 풍토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는 음악 어법(예컨대 한스 짐머의 것 등)이 당대에는 유럽에서 건너온 작곡가 및 음악학도들의 음악이었다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가 소개하는 이 <아득한 울림>에서 온갖 입체적인 심상들이 음악으로 표현되는 방식도 훗날 할리우드에서 통하게 된 음악 어법과 은근히 닮은 구석이 있다. 이 곡을 자세히 들어본다면 독일 음악의 역사가 미국 영화산업의 돈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놓아버린 음악적 혁신성, 대담성, 창조성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이 작품을 조각조각 나누어 들었지만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몇 부분 존재하는데, 먼저 이 부분. Nachtstück(야상곡). 


Nachtstück - <Der Ferne Klang>

'Nachtstück'은 독일어로 nocturne, 즉 야상곡이다. 밤이 자아내는 고독과 신비의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는 것이 특징적이다. 얼핏 들으면 할리우드 음악의 상위 호환처럼 느껴진다. 물론 웬만한 영화 음악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잘 짜인 예술 작품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음악을 듣고 "이 세련된 영화 음악은 어떤 영화에 삽입되었나요?" 하고 물어볼 것만 같다.



드디어 내가 맨 위에서 언급한 '첼레스타의 신비로운 음향'이 도드라지는 부분을 소개하려 하는데, 이 부분은 사실 이 오페라의 피날레 부분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전주곡에 등장하는 모티브와도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수미상관 구조를 이해하려면 결국 전주곡부터 먼저 들어 보아야 한다.


전주곡(Vorspiel)


전주곡


전주곡에 등장하는 모티브와 테마들 전체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므로 꼭 기억해 놓으면 좋다. 브라스의 웅장한 소리로 시작한 바로 다음에 가벼운 관악기들에 의해 이어지는 하행 선율의 모티브가 중요하다. 당장 전주곡에서도 이 부분은 작은 음량으로 관악기, 현악기 등 음색을 바꿔 가면서 등장한다. 악보로 보면 다음과 같다.


친절하게 색칠까지 했다.


이 부분이 오페라 맨 마지막에서는 다음과 같이 변한다.


3막 피날레

   5분 20초에서부터 첼레스타가 위에서 노란색으로 언급한 그 모티브를 연주하면서 서곡에서 예감되었던 심상을 형성해내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서곡에서는 이 모티브 전에 배치돼 있었던 브라스가 피날레에선 모티브 다음에 나온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종의 대칭 구조를 이룬 셈이기 때문이다.


 친절하게 악보까지 가져와 본다면 3막 피날레 신에서는 그 모티브가 이렇게 변용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피날레에서 첼레스타가 자아내는 신비스러운 음향 (1)
피날레에서 첼레스타가 자아내는 신비스러운 음향 (2)

마지막에 그레테의 대사 "Fritz, ach Fritz, was ist dir?" 뒤에 위에서 적은 대로 브라스가 비장한 마무리를 하기 전까지 이 첼레스타가 '아득한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신비로운 음향'을 자아내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오페라가 이름값, 즉 '아득한 울림'다운 음악이 된 데에는 이렇게 첼레스타를 마무리에 잘 사용한 덕이 분명히 있다. 대중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나 각종 오늘날의 각종 대중 영화들에서는 비장하거나 요란한 마무리 전에 첼레스타 유의 악기를 사용해 신비감을 조성해 내는 시도가 잦다. 그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피날레나 이 <아득한 울림>의 피날레에서 첼레스타가 사용된 것과 같이 당대로서는 혁신적이었던 시도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당연해 보이는 그러한 음악적 내러티브 구성 기법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작곡 기법 상의 혁신성 여부를 떠나서 내게 이 첼레스타가 자아내는 소리는 충분히 '아득한 먼 곳으로부터 신비롭게 내게 다가오는 음향'이라는 심상을 형성해 내기에 충분히 아름답다. 아득한 음향에 대한 나의 원형 심상이 또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브람스 <교향곡 4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