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by 이도경

이건 참 묘한 일이다. 글을 통해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낸 것만으로도 당시의 감각과 감정이 떠오르다니.

죽음.

마치 소나기처럼 갑작스레 나타나 내 몸을 흠뻑 적시고는 도망간다.

쏴아아--

온몸 구석구석, 비에 맞은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젖은 옷은 무겁게 내 몸을 휘감고, 아주 미세하게 힘을 주며 나를 땅 속으로 잡아 이끈다. 내가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주위는 어두컴컴한 칠흑 뿐이다.

이런 죽음을 나는 그때도 똑같이 느꼈을까.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그렇게 서글프게 울었을테지.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어린 아이의 울음을 낼 수는 없다. 슬픔 속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나의 눈높이에서 보이는 것을 단어로 하면, 나태, 오만, 위선, 겁쟁이, 두려움, 의심, 염세. 이것들이 기분 나쁘게 몸 속 혈관을 타고 찐득하게 흐르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에게 희망을 던진다. 그 기회를 움켜쥘지 말지는 우리의 선택이 달려있는 것이다.

소나기.

소나기가 언제 또 내릴지 모르겠다. 아직도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가득하다. 걷는다면, 그저 묵묵히, 고독하게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지.

남자는 흠뻑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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