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아버지는 말다툼을 하고 계셨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머니는 안방에서 나와 아버지의 잘못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아버지는 '왔냐?"란 말씀만 하고 안방에서 베란다로 나가 의자에 앉아 햇빛을 즐기셨다. 어머니는 아직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 거렸다.
"너그 아브지가 사람이 뻔히 보고 있는데도 속인다 아이가! 잘못하자 들켰으면 잘못했다 하면 끝날 일을 둘만 있다고저러코롬 계속 우긴다 아니가! 그라면 되나?"
분명 큰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어머니의 장단에 맞추는 것이 정답이다. 초반에는 어머니 편이다.
"도대체 뭡니까? 뭐가꼬 이랍니까?"
큰 소리를 치며 안방을 들여다봤다. 군용 담요 위에 보름달과 학, 매화 등 열두 폭 동양화가 펼쳐져 있다. 쌓인 동전을 보니 아버지가 많이 이기셨다. 두 분이 점 100원자리 화투를 치셨나 보다. 가끔 치매예방 겸 심심함을 달래려고 치신다고 들었다. 어머니 들으시라고 부러 아버지한테 큰소리친다. 아버지만 쳐다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아이고, 그냥 엄마하고 재미로 하면 됐지 뭐 얼마나 따시려고 속이고 그랍니까! 마, 잘못했다 하이소!"
아버지께서도 알아보셨지만 모른척 하신다.
"내가 속이긴 뭘 속여, 너그 엄마가 자꾸 꼬니까 짜증을 내는 거지! 난 잘못한 거 없다."
"봐라, 절대 잘못했단 말은 안 하제!"
"졌으면 곱게 졌다고 해라. 사람을 속이니 마니 하지 말고."
평상시 같으면 '그래 내가 좀 그랬다'하고 끝났을 일을 아버지도 이번엔 안 속였다고 말씀하신다. 어이구 머리야~
"엄마, 얼마 꼴았어요? 내가 드릴께! 500원? 1,000원?"
"야가...누가 돈 때문에 그라나 사람 속이려는 심보가 글러먹었다 아니가!"
두 분다 양보할 뜻이 없다. 아이고 머리야~. 양쪽의 주장이 워낙 완강해서 오늘은 중재가 잘 안 된다. 두 분 사이에 끼인 나는 결국 중립 선언을 한다.
"난 모릅니다. 두 분이 알아서 하이소. 난 중립!"
두 분 사이에 끼어 입장이 애매하거나, 괜히 말싸움에 말려 이득 될 것이 하나도 없을 땐 미리 중립선언하는 것이 좋다. 편하다. 물론 중립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두 분이 결정할 일이다. 주장이 센 사람이 유리하지만 거의 대부분 어머니가 이긴다. 늘 불리한 쪽이 호의적으로 중립이라 말하며 제안하지만 결정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쪽은 용인하지 않는다. 중립도 힘이 동등하거나, 중립을 요구하는 쪽이 힘이 쎌 때나 통하는 것이다.
1904년 초 러일전쟁 발발 직전에 고종황제는 러시아도 일본도 아닌 '중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약소국 황제 고종의 중립 주장을 무시하고 대한제국에 상륙한다. 곧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 조인을 강요한다. 결국 약자의 중립 주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럴때는 이 분위기의 판을 깰 수 있는 화제전환이 필요하다.
"일부러 점심때 맞춰서 왔더만, 싸운다고 밥 안 줍니까?"
결국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밥 한 끼를 꺼내 들었다. 요즘은 부모님과 밥 한 끼 먹는 일이 참 힘들다. 부모님은 항상 한 끼라도 밥을 챙기려고 하는데, 워낙 먹을 것도 많고,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많은 요즘이라 어머니가 챙겨주는 밥을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아가 배고프다구만 밥 안주나!"
아버지도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며 국면전환을 노린다. 어머니는 의외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신다.
"우짜꼬, 화투 친다고 밥을 안 했다 아니가. 밥은 금방 하면 되는데 반찬이 김치밖에 없다." 하면서 곤란해 한다. 지금이 찬스다. 결정적 한방!
"그라면 중국집 불러 먹읍시다. 오랜만에 우동하고 탕수육 먹지요! 제가 살게요. 아버지하고 나는 간짜장, 어머니는 우동 맞지요? 탕수육 하나 하고!"
어머니가 반색을 하신다.
"그라자, 그라자. 밥 할라면 시간도 걸리고 반찬도 없고 중국집 불러라."
아버지도 베란다에서 거실로 옮기면서 화해한다.
"그래, 오랜만에 자장면 먹어보자."
역시 싸움을 넘어서는 강력한 관심거리 한방이 있어야 이 싸움이 정리된다. 중국집에 음식 주문을 마치고 확인해 본다.
"그나저나 아까 얼마 갖고 그리 싸운 겁니까?"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웃으며 동시에 대답한다.
"700원!"
그 소박하고 화려한 꽃싸움에 난 머리를 감싼다. 아이고, 머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