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영이 나영이 다훈이
가까운 인연이라 할지라도 먼 사람들이 있고
먼 인연이라 할지라도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는, 적어도 나의 바이올린 세계에서는,
전자는 동급생이었고 후자는 대게 동생들이었다.
아무리 과거가 깊고 오랫동안 같이한 가까운 인연들이라 할지라도 J, C와 나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존중의 간격이 존재했다.
더불어 '최고령자', '멋진 언니오빠들'의 위치인 우리를 우러러보는 동생들은 그 어떠한 인연도, 과거도, 접점도 없었으나 가까운 애정이 존재했다.
동생들에 대한 가까운 애정은 조금 더 챙겨주고자 할 때 발현하기 마련이건만, 유난히 바이올린 학원에서의 동생들은 나를 좋아했으며, 나의 관심을 사고 싶어 했다. 적어도 한 명은ㅎ
그 과정에서 신기함을 느낀 내가 반응할 때, 서로의 애정이 접점을 이루곤 했다.
애정의 접점을 이룬 우리들은, 바이올린 학원에서의 '새로운 인연'이라 부를 만큼의 인연을 이루게 되었다.
이름은 가명으로 가영이 나영이 다훈이.
가영이와 다훈이가 같은 나이, 나영이는 그보다 한참 어렸다.
내가 어렴풋이 알기로는 가영이와 다훈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나영이의 정확한 나이는 끝내 알지 못했다.
어리게 봐주면 7살, 많이 봐줘야 8살 정도로 보이긴 했다.
사실 취미 악기의 특성상, 나이가 올라갈수록 인원이 줄고 중학생이 되면 계속해는 경우가 많이 없었다. 계속한다 한들, 합주에는 불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합주 참가자 중에서 우리가 제일 '고령자'였으며, 우리 밑으로 동생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렇지만 대게 어린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친했으며, 바이올린 학원에 오는 행위 자체에 큰 즐거움을 느끼는 아이들이었고, 권수가 낮았기에 대략 4권부터 하는 우리 합주가 시작하기도 전에 집에 가버렸다.
해맑은 그들은 바이올린 권수나 실력에 대한 큰 집착이 없었으며, 그들에게 우리란 그저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전봇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동생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리와 뒷부분 합주를 하는 애들이 가영이, 나영이, 다훈이었다.
처음 그들을 마주했을 때 가영이와 다훈이는 6권, 나영이는 5권 후반, 우리는 7권 즈음을 연주하는 정도였다.
바이올린을 너무 사랑하던 나영이는 자신이 다 연주하고 나서도 집에 가지 않고 우리들의 연주를 기다리곤 했다. 6권이 끝이 나고 진도가 거의 동일했던 가영이와 다훈이가 내려가면, 무대엔 우리만 남곤 했다.
그때 가영이와 나영이, 다훈이는 우리를 한두 곡 정도 구경하곤 했다.
초반에는 우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구경하는 시간이 짧아지곤 했다)
짧은 시간 동안의 합주를 함께했지만, 그 짧은 시간은 우리가 서로를 인식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가영이는 이쁘장하고 성숙한 여자애였다. 대게 나보다 먼저 와서 전 권들 합주에 참여하거나 밖에서 기다리곤 했다. 생각해 보자니, 늘 J 옆에 어딘가에서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가영이도 나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들어올 때 따라오는 시선이라든가 뭐 그런 걸로.
나의 위치를 제외하고도 내가 좀 별나긴 했다. 그 삼인방 중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었으며,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바이올린을 레슨실에다가 두는 것도 그랬다.
가영이는 나와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었다.
학교에서 어렴풋이 서로를 보기도 했으며, 그 사실을 안 가영이 어머니와 합주 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몇 살이야?"
"아 저 6학년이요!"
"어머, 가영아, 00오빠랑 나이가 똑같애, 이 언니~"
"그럼, 6학년은 시간표가 어떻게 돼?"
"아, 저희는 수요일을 빼고 다 6교시인데, 수요일만 5교시인 체재로 운영 중이에요!"
"아 그럼 5학년이랑 똑같네?"
한 번은 문구점에서 몇 개의 잡동사니를 들고 계산대 앞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며 서성일 때, 어떤 분이 계산하러 다가오셨다. 자연스럽게 나를 지나시려던 그때, 나는 그분을 알아보았다.
가영이 어머니셨다. 순간 눈이 마주쳤고 그분도 날 알아보셨다.
"어..?"
"어,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참 웃음이 나오는 사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후 합주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해서 가영이를 보았고 발맞춰 걸어갔다.
6권 꽤 후반대까지 능숙히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쌓았던 가영이는 어떠한 이유로 가족들과 함께 해외에서 2년 동안 살게 되었다고 선생님께 전해 듣게 되었다.
다훈이는 가영이와 어렴풋이 아는 사이인 듯했다.
마르고 내성적인 남자아이었는데, 그런 만큼 나도 걔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걔도 나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자연스레 애정의 접점도 줄어들었다.
가영이와 비슷한 진도에 사실 가영이와 비슷한 외모....
처음에는 형제자매인 줄 알았다.
사실 나에게는 가영이의 분신처럼 느껴졌던 부분이라, 가영이 없이 다훈이만 올 때면 좀 허전함?을 느끼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훈이는 말이 정말 없었다.
만약 상황이 달랐다면 다훈이와 더 친밀했을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본다.
그저 그렇고 그럴 수밖에 없던 사이.
나영이는 너무 귀여웠다.
말했다시피 다른 아이들보다 어렸고(혹은 어려 보였고) 상당히 외국인처럼 이쁘장하고 귀엽게 생겼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바이올린 실력과 열정이 엿보이곤 했다.
내가 지켜보는 동안 5권 후반에서 6권 중반까지 진도를 뺐는데, 그것은 나이로 따지자면 그때의 나보다 훨씬 더 빠른 진도였다.
나영이는 나를 정말 좋아했다.
무슨 우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나도 이 학원에서 제일가는 사람들 중에 한 명밖에 없는 여자인 저 언니처럼 일짱이 되어야지!!!
이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곤 했다.
그 사실을 내가 명확히 알 수 있을 만큼 빤히 쳐다보곤 했다.
나영이는 이전 아이들과 합주를 같이하고 있기도 했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대부분 어머니가 바이올린을 꺼내 세팅 중이었고 나영이는 모든 곳을 걸어 다니며 몸풀기(?) 중이었다.
언제 한 번은 우당탕 들어오는 나를 보고 나영이가 소심하게 인사를 했다.
"언니 안녕."
"어~ 안녕~~~"
나의 무심코 던진 인사가 나영이의 얼굴을 그리 밝힐 줄 누가 알았을까!
그날 레슨에 선생님께 여쭙자 선생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휴, 우리 나영이 엄청 좋아하겠네. 레슨 때 또 와서 자랑하겠다, 큰언니가 자기한테 인사해 줬다고."
나영이는 자신의 차례가 끝나도 꽤 오랫동안 우리의 합주를 들었다.
그것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놀면서, 킥킥대면서, 때론 춤추면서(..)가 아닌, 의자에 앉아서 얌전히(.. 도 아니긴 하지만), 꽤 얌전히 우리의 노래를 흡수하곤 했다.
선생님이 7권! 을 외치고 가영이 다훈이가 내려가면 때때로
"으헉, 7권!!"
이란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J와 C도 우리의 진도와 실력 때문에 찬양하는 듯했다.
유별나지만 활발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한 번은 '백만장자'라는 노래로 나, J, C, 가영, 나영, 다훈이 함께 연주를 할 계획이었다.
스즈키에 없는 곡이지만 다섯 명 다 한 번쯤은 배워본 노래였다.
그러나 나영은 이제야 막 배운 단계, 가영, 다훈도 다르지 않았다. J와 C는 오래전에 배웠던 것이 기억만 나는 단계.
반면 나는 6학년 때 장기자랑을 위해 이 곡을 굉장히 심도 있게 연습한 후였다. 장기자랑 후였으며, 나는 이 곡을 매우 빠르게, 즐겁게, 경쾌하게, 춤추듯이 연주할 줄 알았다.
원래 그런 곡이므로.
선생님은 시작하기 전 한 번씩 그어보는 우리들을 둘러보시더니 나를 혼자 독주를 시키셨다.
"다들 내려오고, 에원이 혼자 한번 연주해 보자.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만 보여주게."
나의 미약한 거부를 뚫고 그 독주는 이뤄졌다.
역시나, 고된 연습 끝의 결과물이었기에 나는 만족할 만큼 잘했다.
가영, 나영, 다훈의 어머니들도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셨고 다시 아이들이 내 곁으로,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때 나영이,
"언니, 멋지게 연주해 줘서 고마워요!"
귀엽고 따뜻했다.
그때, '멋지게 들어줘서 고마워,' 라고 말해주지 못해서 너무 아쉽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웅변이 좋았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텐데.
그럼 그 말 하나에 나영이는 몇 번이고 웃었을 텐데.
가영이 나영이 다훈이.
그들은 참 좋았다 익숙했다.
사실 잠깐 스쳐갔던 또 한 명의 동생도 존재한다. 너무 짧은 접점이었건만 너무 인상적인 접점이었다.
라영이. 라영이는 얼굴이 아주 동그랗고 똘똘하게 생긴 아이였다. 여태까지 합주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였는데 어느 날 나타났다.
나는 그때 조금 늦어 헐레벌떡 들어와 레슨실로 들어가는데, 그때 처음 보았던 라영이가 날 정확히 보며 인사했다.
"안녕 언니!"
"어어? 안녕!"
난 처음에 C나 J의 동생인가 의심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인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이라면 어떠한 접점이래도 있어야 하는데...
C는 남동생이 있는데? J? J가 형제자매가 있었던가??
그 아이는 우리와 합주를 그날 같이했다. 대략 가영다훈과 비슷한 진도.
그날 레슨에 선생님께 여쭤보니 환히 웃으신다.
"아 라영이~~~ 라영이 귀엽지 밝고. 옛날부터 다녔는데 일정이 안 맞아서 합주는 잘 못 나왔어. 왜 합주 처음 하던 날에 엉엉 울었는데!"
"아!!"
그 말을 듣자마자 기억났다. 자신의 첫 합주를 앞두고 긴장되어 울어버린 아이.
(이 브런치북 <인연들>에서 잠시 등장)
너무 반가웠다.
그 아이가. 정말 오래전에 학원이 따뜻하고 몽글할 때 처음 마주했던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러고 보니 이들과 하는 합주는 옛날처럼 따뜻했다. 그때처럼 마냥 다정하고 몽글몽글하진 않았지만 무언가 환하고 뜨거웠다. 기다려졌고 기대됐다.
애정의 접점이었다.
언제 한번, 나는 역시 부리나케 학원에 입장했다. 마냥 노란빛의 학원 분위기와 오밀조밀한 신발들이 모인 신발장이 날 반겼다. 그걸 넘어 학원에 들어온 순간,
"언니 안녕!"
"안녕!"
"안녕 언니!!"
차례대로 라영, 나영, 가영.
엄마들은 입에 웃음을 머금고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고 계셨다. 난 아주 매우 어른스럽고 시크하게!! 대답했다.
"어~~ 안녕!"
그들은 음악 속에서의 애정으로 형성된 아주 애매한 관계니까.
그들은 절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많은 관계를 기억하는 나에겐 소중히 남을 테니까.
수없이 즐겁게 행복하고 따뜻했지만 흐릿한 옛날의 합주, 옛날의 학원과 환하고 기대되던 또렷한 이때의 합주 중 고르라 한다면, 아마 이들과의 추억을 고를 것 같다.
망설임 없이, 단숨에라고 하진 않겠지만, 내가 꽤 자란 와중에 느끼던 이런 감정과 쌓았던 이런 관계는 분명 멋졌다. 찬란하진 않았지만 밝았다. 심장이 뛰는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 무엇보다 애매하게, 신경 쓰이게 미지근했다.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그들이 날 기억했으면 좋겠다.
멋지고, 대단하고, 훌륭한 한 영웅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저 세명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하더라도,
환했던 음악가들의 한 조각으로 기억되고 싶다.
여러 관계나 과거를 유난히 깊게 기억하는 나는 많은 경우 일방적으로 추억을 안고, 되새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유감을 느끼지 않았다.
나란 존재가 기억함으로써 그 추억이 무한해진다면, 나만이 기억한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생각해서.
그렇지만 이 추억은 좀 다른 것 같다.
내가 코로나 이전의 그들을 기억하듯, 어렴풋이라도, 가영 나영 다훈 라영도 날 기억했으면 좋겠다.
또렷한 짝사랑보단,
흐릿하더라도 쌍방향으로!
기억하니 얘들아...;)
오늘도 간절함 속에서 피어난 뜨거운 글쓰기를 이어나가는 에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