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 없이 2박 3일
교회에서 아이들을 인솔해 2박 3일 수련회를 왔다. 아이들 먹을 간식거리도 몽땅 준비하고, 물도 챙기고, 핫팩도 챙기고, 현금도 챙기고. 빠진 것은 없겠지? 두 번 세 번 검토하고,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출발했다.
그렇게 수련회장에 도착하고 숙소에 짐을 푸는데, 갑자기 느낌이 싸했다. 모두가 자기 짐을 스타렉스 트렁크에서 꺼내는데... 그 순간, 잠시 온몸이 얼어붙은 채 한 5초간 멍하니 서 있었던 것 같다.
헐...? 내 캐리어를 안 챙겼네..???
준비한 간식과 물과 핫팩과 물품들을 꼼꼼히 체크 후 교회 차에 싣고는, 정작 내 캐리어를 내 차에서 옮겨 싣는 건 깜박한 거다! 와우.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한참을 얼빠진 사람처럼 그냥 서 있다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심지어 누구한테 부탁해 갖다 달라고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왜냐면 내 차키는 내가 여기 메고 온 보조가방 안에 있거든.ㅋㅋㅋㅋㅋ
아주 그냥, 총체적 난국이었다.
같이 온 사람들도 다 같이 한바탕 웃음바다...ㅋㅋㅋ
아..... 나의 휴대폰충전기, 화장품, 거울, 드라이기, 고대기, 속옷, 수건, 빗, 머리끈, 집게핀, 앞머리롤, 여벌옷, 양말, 칫솔, 치약, 클렌징폼, 클렌징티슈, 샴푸, 바디워시, 스킨, 로션, 크림, 팩, 복용약, 영양제, 읽을 책, 일기장이여.........
이 모든 걸 놓고 왔다. 진짜 환장할 노릇이다.
다행히 딱히 없어도 2박 3일간 큰 문제없을 물건들 빼고, 나머지는 어찌어찌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상황에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당장엔 엄청 큰일 난 것 같고
2박 3일간의 일정이 막막하기만 했는데....
최소한의 것들만 편의점에서 구하고 나머지는 포기했는데도 그럭저럭 살아지는 것이었다!
캠프 첫날을 아무 탈 없이 (생각보다) 잘 마치고 숙소에 누워, 오늘의 해프닝을 돌아본다. 문득 새해를 맞이하며 이런저런 계획과 결단으로 꽉꽉 채워 분주하던 내 삶이 보였다.
캐리어 한가득 짐을 싣고 오든
(나는 여행 갈 때 짐을 어마어마하게 싸는 편)
혹은 나처럼 멍청하게 두고 오든
나의 하루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내 삶도 마찬가지일까.
오히려 최소한의 것들만 남게 되니 내가 이곳에 온 목적에 더 충실할 수 있었다.
읽으려고 바리바리 쌌던 책, 혼자 글을 쓰고 싶어 챙겼던 일기장과 필기도구.... 이런 것들도 다 두고 왔지만,
그래서 더 눈앞의 순간순간에 충실할 수 있었고
지금 이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 소중한 아이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것이 본질의 힘일까.
오늘 하루 정말 어이없는 실수 덕분에, 한번 더 본질의 힘을 되새긴다.
짐을 챙길 땐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해 보여서 몽땅 다 챙겨보지만,
없어보니 막상 없어도 살아진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불편함과 맞바꾼... 표현할 수 없는 홀가분함과 자유함이 있었다!
‘이것저것’이 줄어드니, 본질에 더 충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