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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 Oct 08. 2020

업무 범위 넓히기

모험은 보상을 남기고

누구나 익숙한 게 편하다. 입던 옷, 가던 식당, 먹던 메뉴, 만나던 사람들. 업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늘 하던 일이 편하다.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느낌도 잠깐,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조차 잔잔하게 흘러가는 평온의 시간이다. 새로운 환경을 극도로 두려워하거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타입이라면 더욱 하던 일에 몰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업무 범위를 넓혀나가야 한다. 디자인하던 사람에게 개발을 시키는 정도의 업무 변경이 아니라 웹 기획만 담당하던 사람이 앱 기획, Back Office 기획에도 뛰어들어봐야 한다는 얘기다. 기획자는 상대적으로 다른 직무보다는 다양한 영역을 많이 경험해볼 수 있는 자리다. 자의든 타의든, 좋은 찬스든 나쁜 의도든 잘 모르는 일에 도전할 기회는 반드시 생긴다. 그 기회를 잡아야 한다.




첫 업무에서 개선점들을 방대하게 도출해 낸 결과로 맡게 된 업무는 잠시 공석이 된 사이트 QA 자리였다. 첫 업무와 비슷한 결이라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벌벌 떨며 담당자들에게 알음알음 물어보기도 했고, 너무 물어봤던지 이례적으로 운영팀에서 각 파트별로 PL분들께 교육을 받는 자리도 만들어졌다. 얼마 후에 공석이 된 검색 담당자 자리도 같이 맡게 됐다. 담당자분들이 올 때까지 두 달 남짓한 업무였지만 검색 로직과 사이트 정책을 체득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한 번 만들어진 로직이나 정책은 조금씩 고쳐지지만 특별한 계기 없이 전면 개편을 하는 일은 드물어서 아직까지도 업무를 하는데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야금야금 일을 하던 나에게 갑자기 큰일이 주어졌다.



회사의 상품 픽업 화면 개선을 제안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상품 픽업 서비스는 모바일 앱에서 우리 회사의 상품을 구매하면, 원하는 위치의 계열사 오프라인 매장에서 픽업해 갈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다. 계열사가 하나 추가될 예정이었는데 겸사겸사 화면도 리뉴얼해보자는 거였다. 나름 처음으로 수행하게 된 대형 업무였다. 기존에 진행하던 일도 당연히 의미 있었지만, 내가 드디어 화면을 기획해서 앱에 올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다. 당시에는 업무 R&R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 팀에서 이것저것 일을 시켜보고 있었다. 이 일을 잘 해내면 계속 기획 업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회다!)


기존 UI



요래조래 화면을 사용해 본 결과 바꾸고 싶은 건 정해져 있었다. 구린 사용성. 매장을 선택하려고 진입했는데 무조건 검색을 먼저 해야 하는 UI였고, 버튼은 너무 작고 너무 알록달록했다. 어떤 게 주요 기능인지 모를 만큼. 매장 픽업 시간이 중요한데 지점마다 일일이 시간을 확인해야 하는 게 불편했다. 따라서 단계를 줄이면서 좀 더 트렌드에 맞게 화면을 변경하는 걸 목표로 잡고 기획을 시작했다.



블러 없이 속 시원하게 공개하고 싶은 마음



보통 화면 기획을 할 때는 스토리보드를 그리기에 앞서 손으로 먼저 그려본다. 이상하게 눈으로 문서만 볼 때와 손으로 직접 그려볼 때, 파워포인트로 SB를 작성하거나 인비전으로 프로토타입을 올릴 때 각각의 단계에서 느끼는 게 있다. 그래서 무조건 as-is와 to-be의 대략적인 형태는 손으로 그려두는 편이다. 현재 레이아웃과 포함된 요소들을 간단히 그려내고, 요건을 반영할 부분과 덜어내거나 수정해야 할 부분을 가려낸다.



생각나는 아이디어는 일단 다 그려본다. 오래된 문서 스캔이라 상태가..



떠오르는 안들을 알아만 볼 수 있게끔 죽 그린 다음 기획자들과 의견을 나눈다. 짜 온 안에 대한 설명과 이유, 구동 방식 등을 설명한다. 당시에는 혼자 업무 하던 버릇이 안 빠져서 버릇처럼 디자인 속성도 가미하긴 했는데, 회사에서 협업을 할 때는 꼭 구현 필요한 사항이 아니면 디자인 파트에서 구현하게 둔다. 그 편이 우리 UX 가이드에도 어울리고 업무적으로도 침범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하다면 기능 정의가 아니더라도 구현 방식에 대한 내용은 최대한 상세한 게 좋다. (주로 기존 앱 정책을 따를 수 없는 경우) 그 편이 디자인이나 개발 파트에서 일을 두 번하지 않게 하고 기획자의 의도대로 화면을 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대략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버튼 : 텍스트 버튼 / 이미지 버튼

선택 버튼 : 라디오 버튼 / 체크 박스 / 라벨링 구현 여부

스와이프 : 카드형 / 하단 차지형 / 팝업형

피커 : OS 기본 설정 사용 / 앱 내 자체 구현 (팝업, 디자인 요소 등)



스토리보드 초안 작성



업무 방향이 협의가 되었다면 다른 파트에 공유하기 위한 스토리보드를 작성한다. 다만 저 때는 스토리보드고 뭐고 어떻게 만드는지를 몰라서 파워포인트를 가지고 내가 생각하는 화면을 대략적으로 그려냈다. (보통 SB는 저 정도 수준이 아니고 대부분 도형으로 이뤄진다) 개선안의 주 포인트는


1. 검색 진입 단계 삭제 및 일원화

2. 현 위치 아이콘 및 위치 수정

3. 매장 정보 카드 (스와이프) 형태 제공

4. 픽업 예정일시를 매장 선택 시 가능한 제일 빠른 시간으로 선제공 (후 변경 가능)


위 4가지였다. 기획만 내고 끝일 줄 알았는데, 우리 팀과 운영팀의 팀장님 이하 실무자 분들과 모여서 직접 기획안에 대해 설명하기까지 했다. (이 정도 규모의 개선이었다면 말씀해주셨어야죠 대리님...) 발표 이후 이어지는 피드백 시간은 늘 유용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지도로 바로 진입하는 것과 검색창/매장 정보 카드 형태 플로팅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주셔서 옳은 기획인가에 대한 그간의 고민이 해결된 것 같았다. 특히 픽업 예정일을 바로 제공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 좋았는데, 지도의 축척을 줄였을 때 지나치게 많은 매장이 선택될 경우 정보를 받아오는 데 있어 속도 이슈나 앱 부하가 우려된다는 얘기도 해주셨다. 따라서 자사의 매장만 픽업일을 제공하고 계열사 매장은 정책에 따라 최소 며칠 이후 픽업 가능 여부만 전달하기로 했다.


지적사항으로는 계열사 선택 버튼을 보이지 않게 숨기는 내용이었다. 화면의 구성요소를 덜어내고 단순화하기 위한 변경사항인 건 알지만, 숨겨진 버튼을 보이게 하는 것도 또 하나의 단계라고 하셨다. 또, 고객은 기능을 설계한 의도대로만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숨기는 경우 기본값을 제외한 변경 값은 적용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을 거라고도 하셨다. 지금 UI가 못생겨 보일 수는 있지만 직관적이라 제안한 BI 버튼 형태나 숨김 형태보다는 사용성이 높다고도 하셨다. 기존 사용자의 피로감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계열사 선택 버튼은 기존 형태(체크박스 + BI)를 유지하기로 했다.


갑자기 불려 가서 발표하는 거라 잔뜩 얼어서 어버버 했었는데 생각보다 좋은 피드백을 들어서 한층 자신감이 생겼었다. 신입이 처음 해 보는 기획이라 윗선에서 다 결정한 이후에 결과로 통보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진행 과정에 충분히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셔서 화면 하나를 변경하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운영에 이 화면이 처음 적용됐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너무 신기하고 기분 좋아서 한참을 이것저것 들여다봤었다. 생각하던 화면이 정식 서비스에 포함돼서 런칭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엄청 뿌듯했다.


이전까지의 경험은 FO에 치중된 경험이라 Front 환경을 예쁘게 다듬는 데만 치중해 있었다. 그런데 이 화면 하나만 놓고 봐도 수많은 Back단의 데이터가 물려있었다. 고객이 픽업을 원하는 물품의 재고 연동, 자사 및 계열사 지점의 영업시간 연동, 지도 API 연동... 기획자가 모든 상황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이런 내용들을 알고 있었다면 운영상의 효율을 고려하며 FO 기획을 할 수 있었을 거다. 화면 개선안을 내보라고 했다고 단순히 앱에 떠오르는 화면만 고려할게 아니라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총체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야 했다.






계기는 얼마든지 작을  있고 갑작스러운 순간에도 찾아온다. 운 좋게 1년 차부터 프로젝트에 아낌없이 투입되어가며 배운 데는 새로운 업무를 즐기는 탓도 크다고 생각한다. 위 상품 픽업 서비스 화면 개선 이후로 모바일 앱 리뉴얼 프로젝트에 서브로 투입되어 진행 보조와 통합 테스트 진행을 맡았다. 이후로는 계속 프로젝트에만 투입되고 있다. 운이 좋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아직도 너무 재미있다. (스트레스 정도는 재미와는 관계없다)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FO만 손대는 게 아니라 주문이나 백 오피스, 파트너사 시스템까지 영역이 확장된 적도 있다. 그 정도 범위인 걸 알고 투입된 적도 있고, 몰랐는데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경우도 있었다.


모르는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을 맡지 않으려고 하는 걸 볼 때면 안타깝다. 하는 일만 하는 건 성장에 한계가 있다. 나를 증명하기도 힘들뿐더러, 엮여있지 않은 서비스는 없다. 심지어 하등 도움도 안 될 것 같았던 오프라인 매장 OJT 경험도 써먹을 데가 있었다. 신입이 가장 편할 때라는 말은 몰라도 되는 때라서 얼마든지 실수하고 배울 수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 않는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때는 신입이 된 것처럼 오히려 질문을 퍼부어 가며 배울 수 있다. 과정이나 결과가 반드시 아름다우라는 법은 없지만 지나고 나면 그 과정에서 외연도 확장되고 어느 순간 돌아보면 늘어 있는 업무 스킬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 체험하고 나면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 경험치나 보상이 미미할 지라도. 하급 던전이거나 물음표 던전이라고 해도 때로는 도전해보자. 기획자는 솔로 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내게 어려운 작업은 누군가의 강점이고, 그 강점을 가진 동료가 곁에 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업무 범위를 넓혀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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