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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 Nov 03. 2020

첫 프로젝트를 맡은 당신에게

막내의 역할은 서기, 메신저, 그리고 동네북

처음은 언제나 조금 더 특별하게 기억된다. 설렘이 떨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긴장되고 새로운 나날의 연속. 회사에서의 업무가 대개 그렇지만 당사자의 의도를 반영해서 업무 R&R을 정해주지는 않는다. 해당 직무로 들어왔다고 해도 마침 그 자리가 비어있어야 하고, 그 업무를 맡아서 해낼만한 충분한 역량도 그동안 보여줬어야 하고. 단순 반복 업무는 싫어하고 새로운 일이나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던 내게 담당 업무가 프로젝트가 된 일은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나의 첫 프로젝트는 커뮤니티 전문관 리뉴얼이었다. 커머스 중심이던 우리 회사 앱에 처음으로 탑재된 커뮤니티 전문관은 당시에 급하게 오픈해둔 상태라 전반적으로 수정할 부분이 많았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획부터 시작해서 재구축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첫 업무가 모두에게 그렇듯 다소 얼레벌레한 상태로 투입됐다. 아예 생짜 신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직장에서의 업무 경험도 없었다. 대장들은 한 번 프로젝트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해보면 업무적으로 많이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배우는 것만 해도 큰 자산이 될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장들의 시야고, 숲은 커녕 나무도 아니라 가지만 보기에도 급급한 내게는 상당히 긴장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회의는 시도 때도 없이 잡히고, 프로젝트팀이고 운영팀이고 현업이고 다 나를 찾아오고, 소스 머지를 어떻게 하고 오픈 시나리오를 짠다는데 저게 맞는 건지 괜찮은 건지 알 수도 없고...


일단 프로젝트 관련 회의는 기획이건, 디자인이건, 인프라건 잡히는 대로 다 들어갔다. 사실 여기저기서 떨어지는 잡일만 아니면 막내는 남는 게 시간이다. 회의에 들어가서 알든 모르든 일단 들리는 내용은 다 받아 적고 나와서 복기도 했다. 모르는 거나 헷갈린다 싶은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질문하기도 하고 나와서 따로 여쭤보기도 했다. 지금도 발주사인데 프로젝트 참여율이 높다는 말을 늘 듣는데, 초반에 뭘 모르고 야생에 내던져지다 보니 잘 모르고 불안해서 여기저기 다 끼던 (...) 습관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게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다 낀다고 해서 일을 잘했다는 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나는 아는 게 없었다. 차라리 서비스 정책이나 디자인 회의는 편했다. 늘 해오던 일이기도 했고, 내가 소비자나 회사의 입장에서 얘기하면 되니까. 그런데 인프라나 백오피스에 관련된 내용은 어떻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현재 DB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뒷단에 어떤 기존 프로세스들이 얽혀있는지, 신규 서비스를 도입함으로써 건드리는 기존 서비스는 뭐가 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FO에나 관심 있었지, 그 화면을 구성하기 위한 BO에는 관심을 덜 쏟은 결과였다. 결국 프로젝트를 하면서 기존 운영 화면의 정책, 로직, 관련 히스토리까지 발품 팔아가며 파악해야 했다.




대망의 첫 프로젝트에는 우리 회사 최고의 빌런 중 하나가 유관부서로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무조건 진행해야 하는 외않되 타입. 덕분에 반년 남짓한 프로젝트 기간 동안 FO를 전혀 다른 디자인으로 3번 갈아엎었다. 쉽게 말해서 디자인이지, 화면 구성 요소들도 바뀌면서 기획을 계속 새로 해야 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점인지는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짬이 찬다고 막을 수 있는 정도의 빌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경험이 있었더라면 우리 대장에게라도 강력하게 어필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늘 남아있다.



그냥 처음부터 듣는 척이라도 하지 말던가



일은 일대로 못하고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대로 꼬였다. 프로젝트팀은 계속 변경되는 요건에 이어지는 야근으로 잔뜩 날이 서있었고, 운영팀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상황에 대해 제대로 공유받지 못해서 불만이었다. 나름대로 챙긴다고 챙겼는데 혼자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놓치는 부분이 있었고, 하필 그게 디자인 컨펌이었다. 디자인 관련 커뮤니케이션으로 계속 삐그덕거리는 걸 알고 있었다. PM을 통해 몇 번이고 디자인 파트와 확인 절차를 거치도록 의견 전달을 했었다. 그 후로는 별다른 피드백이 없어 잘 진행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저 각자의 일이 바빠서 프로젝트가 뒷전으로 밀렸던 거다. 통합 테스트 직전, 테스트 제반 사항을 공유하는 회의 중에 갑자기 운영팀 팀장님께 불려 나갔다. 전체 시안이 저렇게 3번이나 뒤집히는 동안 디자인에 대해서 전혀 공유받지 못했다고 했다. 기존 앱 디자인 가이드와도 거의 맞지 않아 손 볼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이 상태로는 오픈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관련 건으로 운영팀 팀장님께 한 마디, 디자인 PL님께 한 마디, 프로젝트 팀에서 한 마디, 현업 팀장님께 한 마디씩 듣고 나니 문득 서러워졌던 것 같다.



화나서 우는 것 좀 안 하고 싶은 당사자


짧은 회사 생활을 하면서 업무 시간 중에 운 적이 딱 2번 있는데, 그중에 한 번이 이때였다. 그때는 너무 힘들고 지치고 억울했다. 차라리 내가 잘못한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왜 사이에 껴서 동네북처럼 이렇게 치이고 다녀야 하는 건지. 결정은 책임자들이 내리는데 이상하게 일 처리로 욕먹을 때는 왜 꼭 실무자인 내 몫인지.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땐 그랬다며 웃어넘길 수 있다. 던져놓고 알아서 보라고 할게 아니라 확실하게 확인을 몇 번이고 받았어야 하는데. 좀 더 꼼꼼하게 일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자기반성도 할 수 있고. 그렇다고 완전히 억울함이 가시는 건 아니지만.






아침에 문득 저 때 생각이 나서 두서도 없이 글을 써내려 가고는 있지만. 사실 이제 프로젝트를 처음 맡은 우리들에게 회사가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주요 역할은 어디까지나 서기, 메신저, 동네북



어쩌겠는가. 막내가 실무를 맡아봤자 의사결정 권한도 없는데. 첫 프로젝트에서는 저 3가지 역할만 잘 해내도 평타 이상이다. 돌이켜보니 그랬다.


회의 시간마다 어찌나 필기를 해대는지 손이 아플 지경이다. 사람의 기억력은 믿지 않는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다들 자기 편하게 기억하기 마련이다. 무조건 기록을 남겨야 한다. 그 모습이 퍽 인상 깊었는지 도대체 뭘 적냐고 들여다보시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가기도 하셨다. 회식 자리에서도 노트를 찍은 사진을 돌려보기도 하고, 요즘도 회의가 끝날 때마다 오늘은 몇 장 썼냐고 물어보시기도 하셨다. 대장들은 높은 확률로 펜을 들지도 않으니 꼼꼼하게 기록해두고 기록에 의거하여 답변할 수 있는 정도만 돼도 대단한 성과다. 정말이다.


회의 등 일정 공지나 문서 전달을 관련자들에게 잘하고 그 관련자들에게 가서 가끔 말로 두드려 맞아주기도 하는 게 막내의 역할이지 싶다.


이런 말 밖에 못 드려서 송구합니다..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는 할 때마다 배운다. 첫 프로젝트를 맡는 두려움과 막막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도는 덜해졌지만 아직도 새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긴장된다. 꽤 자주 답답하고 힘겹겠지만 잘해나갔으면 좋겠다. 미련하게 참고 버티지만 말고 힘들면 힘들다, 도와달라 얘기도 해가면서 말이다. 시간이 지나서 미화가 된 건지, 경험이 쌓여서 일이 좀 더 수월해진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순간이 당신에게 좋은 밑거름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너무 버티기 힘들 때는 이직할 때 경력란에 프로젝트 한 줄 기재할 수 있음을 떠올리자. 우리 존재 오늘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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