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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Jul 18. 2024

북리뷰, 태어나는 말들

- 언어의 진창에서 태어나야만 했던 말들에 대하여

                 

제11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 태어나는 말들 (조소연)




어째서 그녀의 말들은 정당하고 온전한 말이 아닌, 단절되고 분절되고 비속한 언어들의 진창으로 미끄러졌을까. 나는 왜 그 말들을 귀담아듣지 못했을까. (P.19)      


지은이의 어머니는 애인과 헤어지고 자살하기 직전까지 정신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어머니의 모습을 ‘짐승’, ‘악령이 깃든 모습’, ‘신에게 저주나 벌을 받고 있는’ 등의 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불가해한 모습으로 어머니는 집 밖으로 뛰어나가거나, 가족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기도 하고, 집 앞 물건을 뒤지고 있거나, 아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인 표현들로 난무한 수십 통의 문자를 보내기도 하여 가족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었다.


약 한 달간 긴박하게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어느 날 글쓴이가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어떤 남자를 만났으며 그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하니, 어머니는 신음처럼 “그만해, 그만해”라고 말하곤, 그날 밤 10시경 집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글쓴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의 방에서 팟캐스트를 듣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핸드폰을 살펴보았으나 어머니가 죽기 직전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수치스러운 흔적을 모두 지워버린 상태였으므로 그 남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함으로써 (혹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족들한테 끝끝내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했다.


그 사건 이후 가족들은 모두 어머니에 대해 침묵하게 되었다.

수치스러운 형태로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지은이에게 몇 년 동안이나 자신의 심정에 대해 하염없이 털어놓다가 그것이 거부된 후로는 말을 삼가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을 달래기 위해 탈장이 될 정도로 걷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동생은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였으며, 오빠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어느 날 가족들 앞에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자해를 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며 글쓴이와 서서히 멀어져 간다.


그렇다면, ‘말할 수 없고’, ‘말하기 힘든그 침묵의 언어들은 그저 사라져 버리는 걸까?

고통으로 인해 침묵하게 되었으나 침묵이 여전히 글쓴이와 가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침묵의 언어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침묵의 언어들이 간단히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로 가게 되는 것이라면 그곳은 어딜까? 어쩌면 그 언어들은 우리 안에 있는 진창에 빠져 속절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쓴이는 침묵의 기다림이 주는 숨 막히는 느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그 시작은 어머니가 아닌 '한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이었다.


비록 글쓴이가 ‘우리를 삶의 진창에서 구해줄 단 한 명의 구원자는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녀는 기꺼이 ‘바리데기’가 되어 죽은 어머니를 구원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시도가 이미 죽음의 세계로 떠나버린 어머니를 삶의 진창에서 다시 끄집어낼 수는 없었으나, 글쓴이의 삶 속에서 사회적 억압과, 수치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재정의하고 재발견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형상과 지형도가 불완전한 미완성에 그친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생의 광휘와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었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당신의 인생에는 오로지 비극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얘기하고자 했다. 당신이 그토록 쏟아지는 빛의 한때에 속했던 인간임을 말하고자 했다... 한낮 여름의 빛처럼 부서진 당신의 열망들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P.50)      


그 뒤로 글쓴이는 더욱 적극적으로 ‘침묵하기를 거부하고 이야기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침묵에서 언어의 세계로 나아갔다.

‘자살 생존자’인 글쓴이는 책에서 ‘살아남은 자’ 그리고 ‘이승 사람도 저승 사람도 아닌 이방인’이었다. 이 죽음의 세계에서 글쓴이는 ‘파도에 밀려가서 저승에 갔다가 도깨비의 춤을 목격하고 이승으로 돌아온 해녀처럼’ 다시 삶의 길로 돌아왔음을 서술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언어’를 이해해 가면서 ‘자신의 언어’를 침묵의 진창 속에서 끄집어내어 나온 것이 태어나는 말들, 혹은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태어나야만 했던 말들이다.      


글쓴이는 매 순간 죽고 다시 태어나는 파도가 되기를 희망하기도 하였다고 말했다.

그 문장에서 나는 잠시 머물러 유유히 파도가 되는 꿈을 꾸어 보았다.

  

우리의 삶이 단지 한 번의 삶과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한다면, 우리는 파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부서져서 포말이 된 말들이 죽음을 끌어안은 파도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파도는 자유롭게 먼바다로 떠나기도 할 것이다. 그 바다에서 파도는 다른 사람들과 조우하고 이별하며 새로운 언어로 태어날 것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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