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베트와 한국 >
비수기라서 그런지 도시에 들어섰는데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하다. 지나다니는 차도 많지 않고 마니차를 돌리는 노인분들만 눈에 띌 뿐이다. 그 차분함이 좋다. 칭다오에서부터 출발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를 늘 힘들게 했던 자동차 경적소리가 며칠 전부터는 확연히 줄었고, 가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날리던 흙먼지도 사라졌다.
우선, 전날 저녁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3박(1박에 40위안, 한화 약 7천 원)을 예약해 두었고, 비자 연장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리면 추가로 머물 예정이었다. 4인 도미토리였는데 그 방에 투숙객이 나 혼자였다. 이런 건 비수기 여행의 큰 장점이다.
짐을 정리하고, 시내로 나가 비자 담당 관청을 갔더니 비자 만료가 아직 한 달이 남아있어서 연장할 수 없다고 한다. 자전거로 험지를 다니는 입장에서는 중간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에 미리 연장해 놓아야 마음이 편할 텐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난감하다. 하지만 안된다니 어쩔 수 없다. 그다음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 도시를 제 때에 찾아가는 수밖에. 확인해 보니 샹그릴라로 알려진 중뎬에서 비자 연장이 가능한 듯하다. 자전거 거리로 대략 400km 정도 같은데, 고도를 보니 거의 3000~5000m를 몇 번 오르내려야 한다. 별 문제가 없다면 보름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일단, 이 도시에서 3박 4일간 잘 쉬면서 체력을 보충할 계획이다.
며칠간 캠핑을 해서 저녁에 숙소에 돌아와서는 이것저것 장비 점검을 하고 티베트 관련 책을 읽고 밀렸던 글도 쓴다. 그렇게 늦게까지 숙소 거실 테이블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창 밖에서는 소리 없이 눈이 쏟아진다. 원래 눈 오는 날을 좋아하지만 겨울철 고산지대에서 눈 쌓인 도로를 자전거로 가야 한다니... 게다가 비자 연장 문제가 해결 안 된 상황에서 눈은 가장 큰 문제다. 부디 적당히 오길 기원하며 방에 들어가 오랜만에 지붕 아래에서 잠을 청한다.
다음 날 아침, 다행히 눈은 거의 멎었고 간밤에 내린 눈이 멋진 수묵화를 그려냈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길을 걷는데 어제의 회색빛보다는 뚜렷한 흑백의 오늘의 캉딩이 훨씬 마음에 든다.
아침식사 후 티베트 사원 두 곳을 들른 후 케이블카를 타고 파오마산에 오른다. 높은 산에 걸려있는 구름이 바로 옆을 지나고 있었고,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봉우리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수행을 하고 있는 티베트 비구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아주머니. 높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그곳에 방문객은 나 혼자였고, 주위는 고요하다. 순식간에 흘러가버리는 구름만 없었다면 시간의 흐름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정적이다. 여유롭게 산길 사이를 거닐며 바라보는 구름 사이로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검푸른 하늘과 강렬한 빛줄기에 눈이 시리다. 짙은 구름은 지척에 있는 산마저 완벽하게 가려놓아 잠시 다른 곳을 돌아보고 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만 있었던 자리에 거대한 산이 마법처럼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눈 덮인 높은 산속, 들려오는 새소리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기, 명상하는 승려, 탑을 도는 승려와 목적 없이 배회하는 방랑객 한 명. 평화로운 일요일 낮 시간, 그림 한 폭에 들어온 기분이다.
중국 입장에서 달라이 라마는 정말 큰 골칫거리다. 1959년 라싸에서의 대규모 시위에서 1만 명 이상이 사망한 후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다람살라에 가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운다. 그리고 198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티베트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리게 된다. 2008년 라싸에서 시위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티베트 민중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나 서적 등 그와 관련된 것은 모두 불법이다. 사원에 놓여있는 그의 사진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래도 별 문제없나..?' 하는 걱정도 든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몇 달 전인 3월 이곳 캉딩에서도 중국 정부에 대항하여 시위가 일어났고, 4월 4일에는 시위하던 티베트인 8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티베트 망명 정부에 따르면 3~4월 티베트 전역에서 일어난 시위로 2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수천 명이 구속되거나 부상 또는 실종되었다.
안녹산의 난으로 당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763년 티베트는 장안(시안)을 점령하기도 한다. 이후 종교 파벌 싸움으로 티베트는 분열하고, 몽골, 청, 영국, 그리고 중공군의 침입까지 오랜 기간 외침에 시달렸던 터라, 우리의 역사와도 많이 닮아있어 그들의 아픔이 잘 전해진다. 게다가 한국 전쟁이 시작되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틈을 타고 중공군이 쳐들어와, 국제적인 지원을 받지도 못한 채 힘 없이 점령당했기에 어느 정도는 한국의 역사와도 얽혀 있는 셈이다.
어릴 때부터 역사시간에 항상 들어왔던 한반도의 '지정학'. 중국에게는 티베트의 지정학적 위치가 너무 중요하다. 티베트 고원이라는 천연의 요새는 인도를 비롯한 주변 적대국과의 완충지대로 작용하고, 황하, 양쯔, 메콩강의 수원지이자 각 종 희토류가 매장되어 있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또한 만일 티베트 민족의 봉기가 성공한다면 다른 소수 민족에게 미칠 영향도 무시할 수 없어 중국 정부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다.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티베트가 독립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