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베트의 밤하늘 >
숙소를 나와 조금 가다 보니 주요 도시 이정표가 나온다. 라싸까지 1670km...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거리의 이정표를 보니 티베트가 동서 거리 2500km의 광활한 지대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티베트 자치구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이 318번 도로를 따라 꼭 라싸까지 달려보고 싶다.
얼마 가지 않아 정말 긴 터널이 나온다. 터널 5.6 킬로미터면 차로 갈 때는 얼마 안 될지 몰라도 자전거로 가면 어마어마한 길이다. 게다가 정말 어둡고 터널 안을 달리는 차는 대부분 대형 덤프트럭이다. 웬만하면 히치하이킹을 해서 자전거를 트럭에 싣고 통과하고 싶지만 그게 맘대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 문제다.
야장까지는 오르내리는 길이 많이 있었지만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 늦은 점심쯤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간단히 마을을 돌아본 후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 이곳에서 하루 머무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애매했기 때문이다. 고도 2600미터, 주민은 대략 4만 명 정도의 야장현은 산비탈에 자리하고 바로 앞에는 강이 흐르는 평화로워 보이는 곳이다.
시간은 오후 4시쯤. 그런데 야장을 벗어나자마자 끝이 안 보이는 오르막이 시작되고, 해가 지기 전에 캠핑할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다행히 도중에 넓은 콘크리트 바닥이 있는 곳을 발견해 볕 아래에서 텐트를 설치했다. 평평하고 깨끗한 땅이었고, 바로 뒤에 언덕이 있어 바람도 막아주어 좋았지만, 그 장소 동쪽에 높은 산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아쉬웠다. 요즘처럼 추운 날은 아침에 햇살이 드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하루 시작의 느낌이 정말 달라진다. 간밤에 많이 추웠다 하더라도 텐트에 아침 햇살만 잘 들어오면 바로 따뜻해지고 텐트 안 여기저기에 맺혀있는 이슬 혹은 성에도 금세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 까다롭게 이런저런 조건들을 재다보면 도로밖에 없는 산중턱에서 고립될 수 있다는 걸 잘 안다.
해가 저물자 온도는 순식간에 내려가고 텐트 안에서도 입김이 나온다. 고도가 낮아서 그리 추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계곡이라는 지형적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저녁밥은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있었던 컵라면을 먹었는데, 너무 추워서 그냥 텐트 안에서 다 해결했다. 이후엔 간식을 먹으면서 책 읽기, 이젠 마치 정해진 하루 일과 같다. 텐트 안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기에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고 언어 공부를 하고, 만일 배터리가 부족하면 책을 읽는 게 전부다. 요즘에는 티베트 관련 책과 논문들을 주로 읽고 있다. 지금 내가 거닐고 있는 이 생활 터전에 대한 지난날의 기억들, 그리고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글로나마 매일 조금씩이라도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고양이 세수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습관처럼 취침 전 의식을 한다. 밖에 나가 얼음장 같은 물로 세수, 양치를 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별이 매우 맑다. 주위에 불빛이 없지는 않지만 별을 보기에 매우 좋은 날씨다.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장비를 챙겨 밖으로 다시 나와 이리저리 구도를 잡아가며 릴리즈를 눌러댄다. 완전무장을 하고 나와 처음에는 ‘생각보다 안 춥네!’라는 생각이 들지만, 노출시간을 길게 해서 사진을 수 십장씩 찍다 보면 점점 말단의 감각이 희미해져 간다. 하지만 그런 혹한 속에서도 별들과 노닥거리다 보면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
고등학생 시절, 천체 관측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내 인생에 우여곡절이라 할 만한 사건이 그리 많았던 건 아닌데, 그래도 고등학생 시절의 동아리 활동은 무조건 포함된다. 우여곡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변곡점으로 작용한 셈인데, 복잡한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좋은 쪽으로만 포장해서 말하자면, 나에게 과학의 재미를 알게 해 준 좋은 경험이었다. 중학생 때 수학, 사회, 국어 공부는 잘했었는데 유독 과학만 힘들어했었다. 사실 중학생 때는 항상 농구만 하러 밖으로 돌아다녔지,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중3 때부터이긴 했지만 어쨌든 과학은 어렵고 따분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심화반이라는 명목으로 학교에 나가 선행학습을 했을 때 동아리 선배들이 와서 홍보를 하고 관측회에 와보라고 권유를 했다. 그리고 그 당시 망원경으로 봤던 행성들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후로, 나름대로 이런저런 책도 찾아보고 관련 공부도 하면서 점차 천문학에 대한 흥미를 키워나갔다. 그러다 보니 수학, 물리학에도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엔 대학 전공을 물리학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천체 사진은 고1, 그때부터 찍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나름 오래된 취미 활동인 셈이다.
마치 불나방처럼, 물론 반대의 상황이긴 하지만. 뻔히 추울 줄 알면서, 아니 오히려 일부러 더 추운 곳을 찾아가는 그런 형국이다. 겨울에 구름이 없는 맑은 날은 복사냉각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겨울에 별이 잘 보이는 날은 정말 추운 날이란 의미다.
다음날 아침, 너무 춥다. 몸이 굳어 출발 전 준비 운동을 철저히 해야만 한다. 밥을 제대로 안 먹어서 몸에 열이 안 나는 듯한 느낌이라 뭐라도 좋으니 따뜻한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 산장 비슷한 무슨 건물에 학생들로 보이는 애들이 꽤 많아, 몸을 좀 녹이려 안에 들어갔는데 급식소 같은 곳이 있어 다행이다. 게다가 자율배식이라 좀 많이 가져다 먹고 한참 동안 난롯가 옆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시작된 오르막. 구불구불 끝없이 오른다.
대략 고도 1000미터쯤 올라왔을 때, 길가에 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따뜻한 물이 필요하면 받아가라 하신다. 그 친절함에 결국 할아버지의 빈관에 머무르게 되었다. 숙박에 두 끼 식비를 합쳐서 60위안밖에 하지 않는다는 점이 결정적이긴 했지만, 애초에 할아버지의 친절함이 없었더라면 가격을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게으름을 부리고 싶기도 했고, 편히 쉬고픈 마음에 예정에 없던 2박 3일을 산 중턱에서 보내게 되었다.
손님은 역시 나 혼자. 2박 3일간 주인 부부와 나 이렇게 세 명이서 같이 식사를 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아쉬웠지만, 험준한 지역을 추운 계절에 찾아온 이방인을 환대하고 뭐라도 챙겨주시려는 따뜻한 마음은 잘 전해진다.
그렇게 그곳에서 편히 지내고 또다시 길을 나선다. 또 시작된 오르막.
계속 오르고 오른다. 그러던 도중 도로 옆에서 공사 중이던 분들이 멀리서 손짓을 한다. 알고 보니 그분들은 식사 중이었는데, 나에게도 권했던 것. 기꺼이 그분들 옆에 앉아 같이 식사했다. 그분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내 자전거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어디 가는지, 어디서 자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물어본다. 짧은 중국어로 더듬더듬 단어들만 나열했지만 그분들은 잘 알아듣고는 손으로 굽이치는 물결을 그리며 길이 험하다는 걸 강조한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인사를 하고 나는 가던 길을 이어간다.
그렇게 또 계속 올라 거의 1000미터쯤 고도를 높였다. 좀 힘들다 싶을 무렵 정상 느낌의 전망대가 보인다. 전망대 바로 옆에는 조그마한 상점이 있는데 음료와 군용 식량 같은 발열 레토르트밖에 없다. 그래도 끼니는 해결할 수 있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다. 또 좋은 경치에 텐트를 펼칠 널찍한 공간도 있어 오늘은 여기에서 캠핑하기로 한다.
식사 후 의자에 앉아 티베트 고원 수많은 봉우리를 바라보며 책을 읽는다. 이번 여행에 책을 세 권 들고 왔는데 모두 무게가 꽤 나간다. 두꺼운 중국어 어학책, 니체 양장본, 린드버그의 "서양과학의 기원들", 이것도 양장본이다. 아이패드에도 여러 권 있는데, 확실히 아이패드 보다는 책에 먼저 손이 간다. 무겁긴 하지만 가져온 걸 후회하진 않는다.
여기엔 낮에는 높은 산들과 파란 하늘이, 밤에는 쏟아지는 별, 은하수가 있다. 많은 별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주 공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고등학생 때 추운 겨울, 필름 카메라로 열심히 별을 찍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