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보가 혼자 여행하는
전시장을 나오니 어느새 주변이 어두컴컴해져 있어 깜짝 놀랐다.
아직 낮이 짧은 계절인 데다 전시관에 들어갈 때 이미 해가 한껏 기울어져 있었기에 지금쯤이면 컴컴해지는 것이 당연한 건데 나는 가끔 인지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사람 같이 굴 때가 있다. "늦은 오후에 전시관에 들어간다 & 해가 지면 껌껌해진다" 그리고 "전시관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합쳐지면 "나는 늦은 오후에 전시관에 들어갔으니 나오면 껌껌해질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게는 이 두 가지의 정보가 다 있었지만 결합되지 못했기에 전시관에서 나왔을 때 밖이 어두컴컴해져 있는 것에 놀라버린 것이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오색찬란했던 가상의 세계는 이제 끝이 났고 나는 썰렁한 밤공기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서서 주차를 어디다 했던가 기억해 내려 애썼다. 두뇌를 풀가동해도 어둔 밤처럼 떠오르지 않아 또 한 번 당황해가고 있던 중 가까운 곳에 안전하게 세워둔 차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떠오르는 기억. 나는 이따 나갈 때 편하겠다고 일부러 전시관 가까이에 자리를 찾아 주차했던 것이다.
생각이 짧은 것인지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을 몰랐을 때,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알고 있었던 것이란 걸 깨닫는 순간 허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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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외진 곳의 어둠은 무서워서 나는 얼른 차에 올라타 문을 잠그고 앉아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 아직 체크인 전이라 먼저 호텔로 가 짐이라도 풀고 나와야 할 거 같았지만 호텔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귀찮을 것 같아 저녁을 먼저 먹고 들어가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더니 이번엔 혼자 어디 가서 뭘 먹나 고민이 됐다. 쫄보라 어디든 혼자 가는 건 긴장됐고 귀챠니스트이기도 해서 번거로운 곳은 가기 싫다 보니 선택지는 점점 더 줄어들었고 그러다 중앙시장이 생각났다. 간단한 먹거리를 사 와서 호텔방에서 먹으면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 혼자 여행 왔을 때 간단한 먹거리와 회를 사가겠다고 중앙시장에 들렀다가 지하 회센터로 내려가는 것이 망설여져서 시장을 몇 번이고 뱅뱅돌기만 하다 끝내 그냥 돌아갔던 경험이 있는데, 그 기억과 함께 나는 갑자기 회가 너무 먹고 싶어 졌고 (성공할 수 있을 진 미지수이지만) 오늘, 재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기필코 회를 사겠다고 다짐하며 시동을 거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그 비장함이 너무 짙어 나라를 구하러 가나보다 했을 것이다.
하아.. 이렇게 상황마다 긴장하고 긴장이 풀리고 다시 마음을 그러모으며 쫄보의 심장은 쉴 새가 없다.
중앙시장은 아직 한창이었다. 밝은 불빛들과 들떠있는 사람들과 경쾌한 소음들과 온갖 먹거리들과 그것들의 기분 좋은 냄새들.
하지만 나는 동화되지 못한 채 경직된 승모근과 흔들리는 눈빛과 안 들리는 귀가 되어 회센터가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들을 흘긋 바라만 보고 지나치며 시장통을 한 바퀴 돌고 또 돌고 있었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시추에이션인지... 내 나이 불혹을 넘긴 지가 언젠데 왜 이러고 계시는지... 현타가 오며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에 짜증이 밀려왔다.
분노는 나의 힘! 이라지만, 나는 짜증이 났을 뿐 분노까지는 이어지지 못해 짜증이 나는 중에도 쫄린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에 가까운 이 한심함을 털어내고 싶었기에 아직 덜 찬 (courage) 게이지임에도 불구하고 불쑥 회센터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 할지라도 한 걸음 내딛고 나면 상황은 이제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나는 쿵쾅쿵쾅 하면서도 계단을 내려가 횟집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고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찜해두었던 그 집에선 멈추지 못했지만(용기가 안나 지나쳐 버림) 그다음 어느 횟집에 다다라서는 사람들 뒤에 간신히 멈추어 설 수 있었다.
엄청 큰 메뉴판은 다양한 메뉴조합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는데 선택지가 많다 보니 오히려 결정이 쉽지 않았다. 나는 젊은 커플들 사이에 서서 메뉴판을 올려다보며 뭘 먹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고 가격, 맛, 양 세 가지 고려사항을 면밀히(내 기준) 따져본 결과 참돔+광어 조합을 선택하게 되었다.
주문을 마치고 회를 기다리며 비로소 주변을 두리번거릴 여유가 생겼는데 이상하게도 몇몇 횟집에만 사람들이 몰려있고 나머지 횟집들은 손님이 거의 없이 포장된 횟감만 한두 개 좌판에 초라히 올려져 있었다. 가격이나 신선도나 뭐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닐 텐데 인터넷에서 알려진 몇 군데만 장사가 되는 걸 보니 씁쓸했다. 저 가게들도 메뉴판 같은 걸 좀 더 깔끔히 해놓고 어떻게든 사람들을 모으면 좋을 텐데... 잘되는 가게는 점점 더 삐까뻔적해지고 안 되는 가게들은 점점 더 신선도가 떨어진다. 그리고 씁쓸해하면서도 나 역시 이왕이면 검증된 것 같은 여기 잘 나가는 가게 앞 줄지어 선 사람들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묵은 호텔은 경포해변 바로 앞에 위치한 깔끔한 부띠끄 호텔이었다. 비수기 평일인지라 가성비도 좋고 비슷한 조건의 호텔들 중에 가장 내 취향에 가까운 곳이라 선택해 본 곳이다.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한 호텔이니 바다는 나가서 보면 된다는 효율충의 논리로, 오션뷰를 포기하고 아낀 돈으로 산 회를 들고 입실을 했다. 혼자 묵기에 충분한 크기의 방은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것들만 부족함 없이 존재했고 전체적으로 아늑한 분위기라 마음에 들었다. 밖의 찬기를 털어내고 승모근의 긴장도 풀고 짐까지 풀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릴랙스 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커튼을 치고 티브이를 틀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차에서 갖고 온 피크닉테이블을 침대 위에 펴고 상을 차린다.
회 한 접시와 야채와 초장. 편의점에서 사 온 컵라면과 과자도 등장한다. 기분내기용으로 가져온 커여운 세안밴드를 착용하고 마지막으로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를 꺼내와 자리를 잡으니 이곳이 천국이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참돔 한 점을 초장에 푹 찍어 먹었다. 알코올 때문인지 탄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쏴르르한 기운이 올라오고 쫠깃한 회는 초장과 섞여 달큰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살면서 많은 순간 다른 순간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일을 하면서는 저녁에 뭘 먹지를 고민했고 밤에 누워서는 내일 할 일을 떠올렸다. 약속에 나가선 집 걱정을 하고 집에선 여행지를 꿈꾸고 거울을 보면서는 과거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회를 먹고 있는 지금. 나는 이 순간을 살고 있고 온전히 행복하다. 달큰한 이 순간의 행복을 꼭 기억해야지.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아침의 공기를 한껏 마시고 산책을 할 때는 하늘과 들풀을 보고, 내가 숨 쉬는 그 순간순간을 온전히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며 한 모금 또 한 점을 마시고 먹다 보니 밤은 깊어가고 내 얼굴은 벌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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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 좋고 아늑한 여기 이 호텔의 단점이라면 난방이 너무 잘 되는 바람에 더워서 잠을 깊이 못 잤다는 것... 더워서 그랬는지 이불도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밤새 기억나지 않는 꿈들을 몇 개나 꾸고 얕은 잠이 들었다 깼다 반복하며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