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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수린 May 30. 2024

왜요? 제가 밥 얻어먹는 며느리로 보이나요?

MZ며느리의 시집살이

시어머니 밥은 맛있다. 계절마다 바뀌는 나물, 항상 든든하게 냉장고에 자리 잡은 밑반찬, 매일 다른 국까지 누구나 꿈꾸는 집밥의 표본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한 상을 매일 누리는 축복받은 며느리가 나다. 이런 축복을 받기까지 나름의 마음고생이 있었는데, 그 일은 결혼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흔히들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라 칭하는데 내 식대로 해석해 보자면 그건 문화 대 문화의 만남, 즉 문화대충돌. 우린 문화를 이루는 요소인 의식주를 포함한 관념, 신앙, 규범이 모두 다 달랐다. 분위기도 다르고 말이야. 모든 결혼이 그러하겠지만 '처음부터 함께 살기'를 택했으니 특히나 잘 합쳐지기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우린, 참.. 밥부터 많이 달랐다.

우리 엄마 김명심 여사는 상견례 자리에서도 이렇게 빨리 시집갈 줄 모르고 가르쳐준 게 없어서 어떡하냐며 연달아 송구함을 전했다. 곱디고운 떡갈비를 젓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속으로 '혼자 밥도 잘 차려 먹는데 뭘'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자영업 부모를 둔 자녀답게 혼자 밥 차려먹기는 누워서 떡먹기였다. 전기밥솥에 쌀 두 컵 넣고 쌀 씻고 솥에 넣어 버튼 누르면 밥은 끝났고, 엄마가 끓여둔 국이나 찌개 한 그릇을 떠 와 비벼 먹거나 3분 요리로 간단히 먹거나 반찬이 필요하다 싶으면 계란프라이 하나 굽고 엄마가 해둔 장조림 같은 반찬만 있으면 뚝딱이었다. 그렇게 기세등등했지만 당연하게도 합가 하자마자 망했다.


시댁은 상시 먹는 밑반찬이 구비되어 있었다. 조림, 나물 무침, 찐 야채, 볶음 등 다양한 조리법으로 시기에 맞는 식재료를 사용하셨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반찬들이 대부분이었다. 냉장고에서 꺼내 식기에 조금씩 덜어서 밥상을 채우고 그날 메인요리가 가운데를 차지했다. 같이 식사를 하기 전 어머니의 지휘 아래 앞접시에 반찬을 덜 때도 적당히 덜어야 함이 어려웠고, 다 먹은 반찬이 남았을 때 버려야 할지 아님 어디다 덜어두실지 눈치 보며 맞추는 것도 참 곤란했다. 거기다 밥은 무쇠압력밥솥으로 끼니마다 새롭게 해 드셨다. 반찬도 반찬이지만 나를 제일 떨게 한 건 바로 밥솥이었다.



요망한 압력밥솥

압력밥솥? 우리 집에선 어딘가 콕 박혀있다가 복날 맞이 닭죽 끓일 때나 썼던 그 녀석이 반짝거리는 몸짓과 꼿꼿한 신호추를 거세게 흔들며 가스레인지 중앙의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위용으로 따지면 나보다 서열도 높은 놈이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으면 반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신호추가 아무리 날 불러도 나는 그 신호를 짐작조차 못했다. 나에겐 너무 먼 존재가 압력밥솥이었다.

눈조차 마주치기 힘들었던 압력밥솥님 덕분에 처음엔 기가 죽어 주방에 기웃거리기도 꺼려졌다. 혹시 나한테 밥차리라 하시면 어쩌나 밥 할 줄 안다고 큰소리쳤던 예전의 내가 미워졌다. 아휴 그놈의 드라마가 문제야. 누가 밥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같이 산다는 이유로 밥 한 번 못 차린 며느리란 부채감이 날 감쌌다.


단순하게 밥솥 하나 사면 되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아직 이 집에서 내 영역은 신랑과 쓰는 방 정도였고 주방은 빌려 쓰는 곳이었다. 펜션에 놀러 가면 되도록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모든 물건은 제자리가 있었는데 새로 사는 밥솥은 지 자리가 없었다. 아직 압력밥솥을 밀어내고 당당히 전기밥솥을 둘 힘 또한 없었다. 처음 당당했던 기세는 압력밥솥의 진두지휘 아래 생소한 반찬들의 단체 공격으로 쉽게 그리고 빠르게 꺾여버리곤 말았다.



'빌려 쓰는 주방'에서 '같이 쓰는 주방'으로

어떻게 어떻게 넘기며 한 계절을 보내고 맞이한 주말였다. 스며든다고 했으면서 제일 거부를 들어내는 건 내가 아닐까? 평일에야 핑계라도 있었지만 주말은 얘기가 달랐다. 차려진 밥상에 맛있게 밥을 먹으며 리액션만 하던 날들은 이제 보내줘야 했다. 압력밥솥과의 내외를 종료하고 어머니께 양심고백을 결심했다. "어머니 저 밥솥 써본 적이 없는데 밥 어떻게 해요?"


어머니는 주방으로 앞장서셨다. 얻어 먹을 결심을 한 순간부터 어머니가 나서서 밥을 준비해주실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후회도 됐지만 동시에 한 번은 겪었을 일이라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매번 주방 근처에서 서성이던 모습에서 벗어나 어머니 손길로 열리는 상부장과 하부장에 무엇이 있는지 눈으로 천천히 외우기 시작했다. 그중엔 자취할 때 챙겨 온 나의 머그컵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생경했지만 그렇게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한 끼를 해 먹어도 모든 물건을 어머니의 법칙대로 제자리에 놔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물건이 있어도 되는 곳이었다. 여기는 같이 쓰는 주방이니까.


이제 이 정도 밥은 차릴 수 있다(뿌듯)


이제 n년이 지나고 막내시누네서 온 전기밥솥이 주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쌀을 불리고 냄비밥을 짓는다. 물론 어머니께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반찬을 꺼내 앞접시에 적당량을 덜어내고 애매하게 남으면 어머니 몰래 버릴 정도로 깡도 세졌다. 그래 어차피 나는 어머니에게 나는 완전 신인류가 아니던가? 접점이라곤 없는 90년대생, 거기에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등장한 핏덩이, 소파에 앉으라면 그럴까요? 하고 앉고 리모컨을 뒤적이는.. 어머니의 사 남매 중 누구와도 캐릭터가 겹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마치 복숭아 아이스티에 샷추가 한 것처럼 생각하지 못한 조합으로.




+

별개로 "식사준비=어머니"라는 공식의 방점을 찍는 사건이 생겼는데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더덕시체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일이 일어난 건 바야흐로 어머니의 생신. 결혼하고 첫 생신이다 보니 다른 건 못해도 생신상은 한 번 차려드리겠다고 며칠 전부터 머리 싸매서 메뉴도 짜고 장까지 미리 보며 열과 성을 다했다. 마침내 아침잠도 물리치고 새벽 6시부터 미역 볶고 고기도 재우고 한참 주방에서 뚱땅거리고 있었다. 친구가 '더덕은 굽기 쉬워 그냥 두들겨서 불에 구우면 돼'한 말에 별생각 없이 더덕을 샀는데 한 가지 놓친 점이 있었다. 아뿔싸..! 나 더덕 먹어본 적 없는데? 그 말은 즉슨 더덕을 얼마큼 두들겨야 하는지, 어느 정도 구워야 하는지, 양념이 무슨 맛이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건데, 이미 주방을 부술 듯이 쓰고 있던지라 어머니 아버지도 저 멀리서 은근슬쩍 기대의 눈빛을 주시는 것 같았다. 망했다 하면서 포털사이트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고 일단 열심히 더덕을 두들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오동통한 더덕을 말라비틀어진 먹태포 수준으로 얇아졌고 나는 그걸 상에 올려드렸다. 맛있다고 행복하게 웃어주셨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 어머니는 좀 더 강하게 주방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 하셨다. 친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거리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됐지만..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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