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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Sep 04. 2023

나는야 여덟 살 창의선생님!

열심히, 즐겁게, 자신 있게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졸업한 지 반년이 더 지났지만 현진이는 아직도 유치원을 좋아하고 그리워한다. 그래서 원에 다니고 있는 동생 유진이를 핑계로 꽤나 자주 놀러 가서는 혼자 쪼르르 들어가 한참을 선생님들과 이야기하다 나오곤 한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히 유치원 점심시간에 들러 원장 선생님과 현진이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방학 동안 뭐 하고 지내? 뭐 하는 게 제일 재밌니?"

"엄마랑 창의수업하는 게 제일 재밌어요! 유치원에서 하던 창의수업이랑 다르긴 한데 그래도 엄청 재밌어요."

"유진이 하원하고 나면 같이 뭘 하고 노니?"

"유진이 수업해 주면서 놀아요! 유진이는 제가 해주는 수업을 좋아하거든요! 체육도 하고 음악, 창의, 한글 다 수업해 줘요."(사실이다. 둘이 선생님과 학생이 되어 역할놀이를 거의 매일 하고 있다.)

"그래? 여기 유치원 친구들한테도 수업해 줘도 되겠는데?"

"당연히 잘할 수 있죠! 유진이한테 매일 해줘서 선생님 역할 엄청 잘하거든요."

"진짜로? 선생님이 한 번 추진해 봐야겠다."

"정말이죠? 원장님, 꼭 연락 주셔야 해요. 방학 22일에 끝나니까 그전에 꼭이요!"


그렇게, 의도치 않게, 느닷없이, 원장님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수업'은 현실이 되었다.


현진이의 일곱 살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따로 연락을 주셔서 선생님이 현재 맡고 있는 7살 반 친구들에게 1시간 정도 수업을 하고 같이 점심까지 먹고 가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주셨고, 현진이는 흔쾌히 기쁜 마음으로 그 제안을 승낙했다. 랑 현진이랑 둘이서 방학동안 했던 창의수업 중 현진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주제로 수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생각나는 장면을 그리고 이 곡의 제목을 추측해서 지어보는 수업이었다. 우리가 함께 수업했던 열두 곡 중 일곱 살 친구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여섯 개의 곡을 추려 패드에 저장을 했고, 현진이는 수업 순서와 약간의 대본을 적어 열심히 연습했다. 물론 나는 학생 역할을 해줘야 했으므로, 짧은 며칠간 나도 열심히 말 안 듣는 학생이었다가 착한 학생이었다가 짜증을 잘 내는 학생이 되기도 하며 마치 연극하듯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현진이가 열심히 준비한 자료들을 들고 유치원 문을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이게 뭐라고, 나는 이렇게 긴장되고 또 한편으로는 뿌듯하고 기대되고 다시 또 걱정이 앞서기도 하는 오만 감정이 다 드는 것인가. 왠지 들떠있는 마음 때문인지 동네에서 제일 맛있다는 브런치집에 가서 혼자 첫끼를 먹는데 음식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 겨우겨우 커피만 마시고 있을 때 선생님께 카톡이 왔다. 잘하고 있다며 보내주신 사진 두 장을 5분이 넘게 뚫어져라 바라봤다. 장하다 내 아들. 강한 내 아들.


수업을 잘 마치고 점심까지 먹은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선생님과 함께 나오는 아이의 표정이 아주 밝다. 만족했구나. 그럼 됐다. 생님께서는 아이들이 본인 수업보다 현진이 수업을 더 재밌다고 얘기하더라며, 잠깐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셨다. 영상 속 현진이의 모습은 마치 여러 번 수업을 해봤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자신감 넘쳐 보였다. 그리고 즐거워 보였다. 그간 현진이 마음이 많이 단단해져서 긴장을 안 했을 테고, 준비를 아주 열심히 했으니 걱정 없이 즐겼을 것이다.(물론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고, 수업 듣는 일곱 살 친구들이 정말 멋졌다)


오늘의 현진이는 나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담대해 보였다. 며칠간의 준비과정을 보면서 이미 여러 번 감탄해 왔지만, 성실한 준비 뒤에 마주한 실전을 이렇게 즐기는 내 아들이 오늘은 우주에서 최고로 멋있어 보였다.


그래, 그렇게. 현진이가 살면서 수없이 마주할 많은 도전들을 이렇게 해나가면 돼. 단단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되 즐겁게. 며칠간의 준비과정과 오늘의 수업이 오래오래 현진이 스스로를 기특해할 만한 뿌듯하고 행복한 추억으로 남길. 한 시간 동안 많은 친구들을 현진이 힘으로 이끌어간 경험이, 현진이에게 어마어마한 자신감이 되어 현진이 마음에 새겨지길.

오늘 진짜 진짜 최고였어 정현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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