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만 거리를 둬 볼까요
정신과 인터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바로 가족 관계입니다.
부모님은 어떤 성격이신지, 두 분 사이 관계는 어떤지, 나와 부모님의 관계, 형제자매 관계 등.. 가만히 듣다 보면 사연 없는 가족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이 정도면 괜찮은 가족이지..'라는 생각을 많이 하며 자랐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고, 많은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컸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서 종종 다투시고 큰 소리 날 때도 있었지만, 저 두 분이야말로 '애증의 관계'라는 생각이 들어 냉담함과 혐오, 분노가 가득한 집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어릴 때 했던 '이 정도면 괜찮은 집이지, 더 바라지 않아, 충분해.'라는 생각은 내가 가지지 못한 환경에 대한 부러움, 질투를 처리하는 방식이자 '그냥 괜찮다'라고 문제를 부인하는 쪽에 좀 더 가까웠다면, 성인이 되어, 그리고 정신과 의사가 되어 판단하는 '이 정도면 괜찮은 집'은 조금 결이 다른 것 같습니다. 부모님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가족 내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한 편으론 꽤 아쉬운 부분도 있고, 또 한 편으론 천만다행이고 감사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며 적당히 받아들입니다. 어쩌면 가족과 관련된 과거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가족 내 어떤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한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족이란 테두리에 묶여 너무나 큰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부모, 형제는 선택할 수조차 없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결혼이란 과정을 통해 스스로 선택하고 탄생시킨 가정에까지도 각자의 원 가정이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크나큰 무력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가족이 참 많습니다. 폭언, 폭행을 휘두르는 부모도, 무시하고 방임하는 부모도, 자식에게 과하게 의존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악영향을 끼치는 부모도 있습니다. 정신과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 아주 높은 비율의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 특히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들 중에는 어떻게 가족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연도 많았습니다.
가족 내의 갈등에서 비롯된 고통은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심지어 그것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어 한참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라면요.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그 마음에 집착하면 새로운 고통이 시작됩니다. 어찌하여 사과를 받는다고 한들, 진심이 부족하다고 여겨질 때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굳이 상대를 용서해야 한다고 애쓰고, 잘 안된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될 일이 아닙니다. 원망과 분노가 연민으로 바뀌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들겠지만, 이해하려는 시도는 가끔 우리를 답도 없는 과거에 붙잡혀 있게 만들기도 합니다. 적당한 이해면 충분합니다. 완전히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부모가 자식에게 그래요? "라는 질문 하나로, 공들여 쌓은 이해의 탑은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부모의 인생을 책임지고,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내겠다는 생각도 잠시 접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일단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지나치게 역기능적인 가족이라면, 하루빨리 독립을 하고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한 편으론 나쁘고, 한 편으론 좋은 부분도 있는 보통의 가족에서는 부모 자식 간의 적당한 거리 유지와 자립이 필요합니다. 사회 경제적 자립의 준비가 안 된 자식을 언제까지 지원해야 하나, 늙으신 부모님을 어느 수준까지 돌봐야 하나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니, 이는 각자의 상황과 판단에 맡기겠지만, 기본적인 목표는 '자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식도 무작정 부모에게 기대고 바랄 것이 아니라, 얼른 스스로 살 길을 개척하고 나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부모도 자식 다 키워놓았으니 이제 내가 기대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얼른 자식을 독립시키고 우리 부부가 잘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립을 기본값으로 두고 서로를 대해야 우리는 미워하지 않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