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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줄향 Mar 03. 2024

4. 순식간에, '매인' 집사

아빠집사의 일기

우리 가족 네 명 중에서 고양이 알레르기 검사를 받지 않은 유일한 구성원이 나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둘째 아들 녀석이 고양이를 들이자고 노래를 불렀고 1년 전부터는 와이프까지 거기에 합세해서 고양이를 데려오자고 본격적으로 나를 졸랐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원래 좀 우유부단하기도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을 미루는 셩격이기도 하지만

고양이와 강아지 중에 고르라면 나는 단연 강아지였다.

특히 연희동 주택으로 이사를 오던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는 한 장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언젠가는, 아마도 내가 직장을 그만둔 어느 날엔가 똘똘하고 영리한 강아지를 들여야지,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친구를 앞세우고 우리 동네를 산책하러 다녀야지, 특히 내가 자주 가는 궁동산 산길을 같이 다니면 얼마나 뿌듯하고 기특할까... 하는 내 나름의 계획이 이미 있었던 거다.

그런 나한테 자꾸만 고양이 알레르기 검사를 받고 오라고 하니 회사일이  바쁘기도 했지만 사실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나름 소극적인 저항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을 것인가.  거기다  아내 말 안 듣는 간 큰 남자가 될 정도로 내가 배짱 좋은 남편은 아닌지라 그날 어쩔 수 없이 운전사로 따라나선 참이었다. 마음 한 켠으로는 가서 어지간하면 말려보리라는 생각도 좀 있었다.


둘째와 와이프는 나를 앞세우고 고양이를 보러 가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싶어서 신이 나 있었다.

일산 브리더의 집으로 가는 내내 뒷좌석에 앉은 아내와 아들 녀석은 연신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아들은 랙돌이 어떻고 샴고양이가 어떻고 하면서 생전 처음 듣는 고양이의 종류를 줄줄 읊어대고 있었고 와이프도 거기에 가세해서 코숏과 브숏이 어떻다느니 먼치킨은 어떻고 스코티쉬폴드는 어떻다느니 내가 알아듣지 못할 대화를 열심히 주고받았다.

'고양이가 먼치킨은 무슨 먼치킨이야, 먼치킨은 내가 즐겨 찾는 던킨도넛에서 본 도넛이름인데...'나는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묵묵히 운전을 했다.


일은 브리더의 집에 도착해서 아들이랑 와이프를 먼저 들여보내고 내가 주차를 하느라 잠깐 지체한 5분 사이에 벌어졌다.


내가 실내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둘째 녀석과 와이프는 사랑에 빠져있었다.

문제는 동시에  각각 다른 대상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게 문제였다.


와이프는 잘생긴 수고양이에, 둘째 녀석은 보기에도 안쓰럽게 여리고 약해 보이는 암고양이에 각자 마음을 뺏기고는 서로 얘 좀 봐, 얘 좀 봐를 연거푸 외치고 있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몸소 시전 하는 두 사람 사이에 타협점은 전혀 없어 보였다.

각자 사랑에 빠진 고양이를 당장 한 마리씩 품에 안고 문을 나서기 직전이랄까.


하, 이거 참 난처한 상황이었다.

평소에도 나는 와이프와 아이들의 갈등 상황에서 중재자, 혹은 무마자 노릇을 하는 편이었는데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그때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문장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 그렇다면 두 마리를 다 같이 데려가는 건 어떨까?

어치피 우리가 낮 동안은 내내 집을 비우니까 혼자 있으면 외롭고 쓸쓸하기도 할 거고."


그 말이 허공에 닿은 순간

와이프와 아들은 동시에 놀란 토끼눈을 하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 우리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이 말이 정녕 여기 오는 내내 고양이 입양을 마뜩지 않아하던 아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아?

혹시 여기 다른 아저씨가 있는 거 아냐?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신이 난 두 사람은 그 뒤로는 다시는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 않고 두 마리 입양을 기정사실화 시켰고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케이지 두 개에 두 마리 고양이를 담아서 차 뒷좌석에 싣고는 애기들이 추울까 봐 와이프가 미리 준비해 온 작은 극세사 담요로 케이지를 둘러준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흰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일산에서 연희동까지 펄펄 내리는 눈 속에 운전을 하고 오자니 이 모든 게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두 마리는커녕 내 마음은 아직 한 마리도 키울 자신이 없는 상태였는데 그 목소리는 마치 내 머릿속 한 구석에 오랫동안 저장돼 있다가 그 순간 문득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더 어이없는 것은 브리더 아주머니의 태도였다.

딱 보니 이 집의 집사 노릇은 이 양반이겠구먼, 하는 걸 간파했달까, 아들이나 와이프한테는 하지 않는 고양이 집사의 의무와 책임 항목을 모두 나에게 전수하는 것이었다.

"아버님, 고양이는 밥을 꼭 아침저녁으로 안 줘도 되고 자율급식으로 길들이는 게 나아요,  발톱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깎아주는 게 좋고요, 펠렛 칸 밑에 얇은 기저귀 패드를 잊지 말고 잘 갈아줘야 하고, 가끔씩 털도 빗겨줘야 하는데, 그래도 고양이는 산책이랑 목욕은 생략해도 되니까 강아지에 비해서 훨씬 손이 덜 가는 편이랍니다. 제가 보니까 아버님이 꼼꼼하셔서 아주 잘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ㅎㅎ" (아니 아니, 잠깐만요,  그래도 나는 여전히 늠름하고 믿음직한 큰 개와의 산책을 꿈꾸는 사람이라고요 ㅠㅠ)


고양이들을 넣은 케이지는 물론이고, 고양이들이 먹던 사료 남은 것과 밥통과 물통, 배변 패드, 모래 대용으로 쓰는 펠렛 봉투... 이 모든 걸 내가 옮기고 있는 이 비현실적인 현실이라니...


이렇게 해서 나는 졸지에, 내 맘도 잘 모르는 채 집사가 되는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 이 꼬물꼬물 하는 두 마리의 고양이들에게 꼼짝없이 붙잡힌 것 같다.

브리더 아주머니가 묻던 이 집안의 '메인' 집사가 누구냐는 그 main이 사실은 '매인'이었나 보다.


나 정말 이렇게 '매인' 집사가 된 건가?


나, 너네한테 매인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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