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었다

도시에 살다, 산에 들어가 살고, 다시 도시로 돌아온 엄마의 이야기

by 한들

이것은 도시에 살다, 산에 들어가 살고, 다시 도시로 돌아온 한 엄마의 좌충우돌 경험기이다. 살면서 외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지금과 다른 환경 속에 살면 삶이 새롭게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기도 했고 말이다. 말이 쉽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놓아두고 다르게 산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험을 즐기는 스타일도 아니고, 과감하게 결정하는 단호한 사람도 아니며,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힘들어졌다. 이런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역시 고통이었다.


가장 먼저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산으로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렇게 오래 지속될지 몰랐다. 몇 달 정도가 지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전염병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던가. 하루하루 희망을 품었다 절망하는 것을 반복하다가, 이제는 코로나와 일상을 함께하며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나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개원 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조금씩 자리를 잡으면서 일을 익히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전염병이 창궐했다. 학교는 물론 학원도 모두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사업체를 처음 운영해 보느라 이것저것 낯선 것이 많았는데, 이런 위기 상황을 겪게 되자 많이 당황하고 두려워졌다. 이대로 망하는 것이 아닐까 노심초사했다.


더 큰 문제는 육아였다.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 둘째가 세 살이었다. 학교와 어린이집도 문을 닫았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두 아이를 돌봐야 했다. 이렇게 온종일 두 아이를 본 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늘 어린이집에 낮시간 동안 가 있었고, 주말엔 남편이 있었는데 말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학교에 가지 못해 덧셈과 한글을 집에서 공부해야 했다. 내가 끼고 무언가를 시켜보려고 하면, 세 살짜리 동생이 와서 여지없이 훼방을 놓았다. 세 살 아이는 말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엄마나 누나를 절대로 봐주지 않았다. 그러면 곧 울고불고하면서 공부는 물 건너갔다. 삼 시 세 끼 끼니를 차리고, 아이들 논 것을 치우는 일은 당연한 거였다. 아마도 아이 키우는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모든 일에 능숙했다면, 아이 보는 일을 잘했다면, 집안일을 빠르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일까. 집안은 점점 엉망이 되었고, 나는 자책감과 무능력감을 느끼며 나날이 지쳐갔다.


이때는 시아버님이 하시던 가게도 큰 타격을 받았다. 식당을 하고 계셨었는데, 오랫동안 운영하던 자리에서 옮겨 새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입소문이 나기도 전에 전염병이 돌면서 식당은 운영이 어려워졌다. 젊은 사람들처럼 인터넷 홍보니 배달이니 하는 것은 아주 먼 이야기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님이 가게를 정리하셨다. 그리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다. 이 과정을 겪는 동안 아버님도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 모든 것을 감당할만한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나는 싹싹하고 헌신적인 며느리가 될 수 없었다.


그 무엇보다 결정타는 친구의 죽음이었다.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학 동기의 본인 부고를 받았다. 자살이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그 후에는 그 친구가‘왜 죽었을까?’여러 이유를 분석해 보았다. 그러다 의식 밑으로 가라앉혀 잊으며 살다가 또 가끔씩 ‘왜 죽었을까?’하며 그 친구의 죽음을 떠올렸다.


이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딱히 없었다. 그동안 결혼하고 아기 키운다고 친구를 만나지 않은 지 백 만년은 넘은 듯했다. 남편과 한 두 번은 이야기해보았지만, 계속할 수는 없었다. 친구가 죽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나도 따라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는데, 이런 말을 남편에게 꺼낼 수 있을까. 몇 번을 꾹꾹 눌러 놓았더니, 나중엔 잠이 오지 않고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맴돌았다.


사실 죽은 사람을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시어머님이 암으로 생명력을 잃어갈 때, 죽음을 많이 떠올렸다. 둘째를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기분이 더 들쑥날쑥했었을 것이다. 진통제로 정신이 혼미해진 어머님과 어둑하고 좁은 방에 함께 앉아서 낮 시간을 보내노라면, 답답하고 막막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건 지난하고 지치고 두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천진난만했던 딸아이와 뱃속에 있던 아이가 특유의 신선한 생명력으로 나를 지켜 주었다.


그 이전에도 죽음이 있었다. 대학원을 함께 다녔던 후배와 선배의 자살. 뒤 이어 지도교수님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다. 같이 생활했던 사람의 잇단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친구까지 죽으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느 날,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이 낯설게 느껴졌다. 힘이 쭉 빠지면서 나사가 하나 풀린 것만 같았다. 순간 몸이 이루 말할 것 없이 가볍게 느껴졌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다음 날이 문제였다. 아이 둘을 데리고 출근을 했다. 한쪽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실랑이를 벌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날은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소리는 못 지르고, 눈물만 질질 흘렸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반차를 쓰고 달려왔다. 아이를 맡겨두고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몸이 떨리고 잠을 자지 못하고 기억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몸의 활력이 없어졌다. 기력이 없어서 일을 제때에 처리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울증은 확실히 몸의 문제였다.


고민 끝에 야심 차게 열었던 학원의 문을 닫았다. 얼마간 집 안에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최소한의 집안일만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루는 잠이 오지 않았고, 또 며칠은 계속 잠만 잤다. 아이들이 엄마가 너무 많이 잔다고 아빠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남편이 보다 못해 휴가를 내고 밖에 산책이나 나가자고 했다. 벚꽃이 만발한 봄이었다. 꽃이 너무 예뻤다. 걷다 보니 정신이 돌아왔다. 그다음 날부터 똑같은 시간마다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조금씩 힘이 생겼다. 바닥으로 내려앉았던 의지가 서서히 솟아올랐다.


그렇게 에너지가 살짝 올라왔을 때, 블로그 글 하나를 보게 되었다. 시골학교에 대한 글이었다. 강원도의 어느 산골 학교에 학생 수가 모자라 폐교가 될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었다. 코로나 걱정 없이 학교에 매일 등교할 수 있어서 좋다고도 했다. 귀가 솔깃했다.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째 아이가 학교에 간 날이 손에 꼽혔다. 1학년을 통째로 날리고 이름만 2학년이 된 아이. 어쩌면 이것이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사방이 온통 막혀있는 것 같은 나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곳으로 가면 탈출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가슴이 쿵쾅 대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흔쾌히 좋다고 했고, 그다음 날은 연휴였다. 바로 떠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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