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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May 11. 2021

나아가는 삶

미아 한센-뢰베, 다가오는 것들(2016)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항상 책을 읽는다.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 안에서도, 바람만이 나부끼는 언덕에서도. 심지어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도 그녀는 책의 문장들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다. 그녀의 삶의 굽이마다 텍스트들은 파편처럼 흩뿌려져 있다.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로 산산조각이 난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견뎌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남긴 흔적들이다.


왜 하필 책일까? 그녀의 직업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철학 교사인 그녀에게 책은 가장 익숙한 대화의 수단이다. 문장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그녀에게 타인을 이해하는 데 이만한 수단이 있을까? 책을 읽음으로써 타인을 이해하고, 반대로 선물함으로써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키려는 시도들을 반복해왔을 그녀가 위기의 순간에 문장들에 의지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았던 남편은 외도 사실을 밝히고 별거에 들어갔고, 자신을 괴롭히기만 하던 엄마는 병원에 입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삶의 의지를 잃고 세상을 떠났다. 아끼던 제자는 이제 자신을 행동하지 않는 나약한 부르주아 지식인이라며 비판한다. 나탈리의 안정적인 삶은 순식간에 요동친다. 받아들일 수 없는 크기의 고통에 짓눌려 신음하고, 쓰러져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는 끝내 머리를 질끈 묶고 선다. 


영화는 견디는 삶과, 삶을 견디게 하는 문장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왜 나의 삶이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간신히 붙잡고 서 있던 문장들의 별자리를 그려본다면 관객은 ‘철학이 삶의 위안이 될 수 있는가?’라는 영화의 질문에 답할 방법을 하나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싸구려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이 붙잡고 설 가느다란 기둥으로서 철학의 쓸모를.


시선의 바깥


샤토브리앙의 묘지가 있는 그랑베 섬으로 향하는 배. 그 안에 앉아 있는 나탈리와 한 남자가 화면에 잡힌다. 카메라 앵글이 간신히 붙잡아 둔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질 때쯤 카메라는 나탈리를 향해 서서히 다가간다. 그 때 창 밖에 서성이던 사람이 문을 두드리며 나탈리를 부른다. 그리고 옆에 앉은 사람은 그저 다른 승객이었음을 관객이 알게 되면, 카메라는 그녀가 채점하고 있는 시험지를 슬쩍 클로즈업한다. 그곳엔 이런 문제가 적혀 있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관객을 속이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카메라가 말해주는 바대로 관객은 영화 속 현실을 받아들인다. 카메라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관객은 알지 못한다. 단지 농담 같은 카메라 워크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건은 삶에 주어지는 것이지, 계획 속에 있는 게 아니다. ‘몇 년 후’로 이어지는 장면들과 무관해 보이는 첫 시퀀스는 관객에게 말하는 대신 경험하게 한다. 나탈리의 삶에 다가오는 것들의 무게에 대하여.


나탈리는 반복되는 일상에 무덤덤하다. 새벽에 집으로 와달라며 보채는 엄마의 통화를 받고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출근을 준비하고, 사르코지의 연금 개혁안에 반대해 학교 정문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나는 이곳에 수업을 하러 왔다며 길을 비켜달라고 덤덤하게 요청한다. 한때 열렬한 공산주의자로서 소련까지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그녀지만, 지금 그녀의 가장 큰 목표는 일상의 유지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선 모든 것이 예상 안에 있어야 한다. 그녀의 손에 항상 들려 있는 책들은, 그녀가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인식하고 싶어 한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그녀의 일상을 무너트리는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다. 나탈리의 남편이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관객이 아는 장면에는 나탈리가 없다. 어머니의 죽음도 그녀와 단절된 정신병원에서 이루어지고, 파비앙은 산 속 깊숙이 자리 잡은 공동체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그녀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장소에서 붕괴는 시작된다.


예견하는 책


나탈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관객은 본다. 나탈리의 주변에 놓여 있는 책들은 나탈리가 미처 알기도 전에 그녀에게 벌어질 사건들을 암시한다. 나탈리의 손에 가장 먼저 들린 책에서 시작하자. 한스 마그누스 옌첸스베르거의 <급진적 패배자>다. 고립된 개인들이 암묵적으로 낙오자 정서를 드러내며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고, 자신을 패배자로 규정한 뒤 승자 계급에 대한 분노를 폭력적으로 드러내는 기제를 설명하는 책이다. 아끼는 제자인 파비앙이 학교로 찾아왔을 때 그녀는 이 책을 건넨다.


파비앙은 제자인 동시에, 나탈리의 과거다. 그는 비록 급진적인 해설들을 덧붙이긴 했어도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에 대한 해설서를 쓸 줄 아는 영민한 사람이다. 한때 급진주의자였던 자신처럼, 파비앙의 날카로움도 젊은 시절 한 때를 상징하는 장식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녀에겐 아직 있다. “전 열광적인 글이 좋아요”라는 대꾸나, 책을 건네는 행위는 그 믿음의 증거다.


하지만 나탈리가 이해하기 전에, 그녀와 파비앙의 관계는 아도르노와 68혁명의 학생들의 관계에 놓였다. 아도르노는 학생운동의 기반을 이루는 사유들을 제공했지만, 정작 68혁명의 당사자인 대학생들로부터는 모욕을 당했다. “사유야말로 진정한 실천이다”라고 항변했던 아도르노의 말은 “난 생각과 행동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려고 했어”라고 파비앙에게 항변하는 나탈리의 목소리를 예견한다. 


파비앙은 이미 나탈리에게 옌첸스베르거의 책이 재미가 없고, 대신 귄터 안더스의 <인간의 골동품성>을 건네며 그 길을 예비한다. 기술문명의 발달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우려를 표하는 이 책은 유나바머의 <기술사회와 그 미래>로 이어진다. 문명에 대한 파괴와 테러리즘을 정당화하는 이 책이 그의 서재에서 발견되었을 때에야 나탈리는 파국적 결말을 예감한다.


파비앙 : 시위나 서명 참여 정도로 스스로를 참여 지식인이라 여기죠. 떳떳한 양심과 변함없는 생활...

나탈리 : 내가 부르주아란 말이지? 그 도식 좀 벗지 그러니? 비생산적이야.

파비앙 : 그렇게 보면 편하실 테죠.

나탈리 : 난 혁명을 바라지 않아. 훨씬 수수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돕는 것. 최소한 네게 그걸 전달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아나키즘 공동체로 떠난 파비앙을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꺼내든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곤란한 자유>는 그녀가 보여줄 태도를 예감할 수 있게 한다. 비록 서로 이해하지 못할 타자의 관계라 해도,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이해의 가능성을 교환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은 레비나스의 입장인 동시에 나탈리의 입장이다. 비록 짧게 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누워 있었어도 끝내 일어나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제자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그녀의 모습은 책이 이미 알고 있었다.


견뎌내는 삶


나탈리가 항상 뒤늦게 깨닫게 되는 건 아니다. 나탈리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텍스트들을 기둥으로 삼아, 자신을 뒤로 밀어내는 거대한 바람에 버티어 서서 앞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일상을 구성하는 부분이자, 그녀와 반대의 방향으로 삶을 밀고 나간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한때 단역 연기자를 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화려했던 과거의 삶에 매여 있다. 허무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비싼 옷들을 사고, 사람들의 시선을 얻기 위해 자살 소동까지 벌인다. 소방대원들마저 고개를 가로젓는 순간이 되자 나탈리는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차에 앉아 울먹거린다. “맙소사 그 냄새라니. 죽을 날만 기다리는 냄새.”


고립된 곳에서 생의 의지를 잃은 어머니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울며 돌아온 그녀는 장례식장에서 파스칼의 <팡세>를 꺼낸다. 절망 속에서 신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징표마저 주지 않을 때, 파스칼이 그 고통 앞에서 구원의 실마리를 찾고자 절박하게 외쳤던 말들로 가득하다. 나탈리는 나지막이 문장을 읊는다. 문장의 뿌리를 마음에 심듯이.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암흑 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 안식할 것이다


추도사가 흐르는 동안 장면은 바뀐다. 장례식이 끝나고 그녀는 햇빛이 가득한 버스에 앉아 운다. 젊은 여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끝간 대로 사라지기는 해야 하는 삶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산산이 부서진 일상의 파편들에 베이면서도 그녀가 심어 놓은 문장들이 자라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것은 영웅의 실루엣이 아니다.  


위안으로서의 철학


나탈리는 자신이 애써 유지하려던 일상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납득할 수 없는 사건들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치기도 했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며 견뎌낸다. 원제인 미래(l'avenir)는 나탈리의 삶의 방향성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울로 추락하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기로 마음 먹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에게 철학은 고비를 버티는 위안이었다.


철학 교사이기에 책을 기둥으로 삼아 버티는 삶은 허세가 아닐 수 있었다.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의 삶을 조화시키는 태도는, 더 나은 삶, 더 많은 벌이, 더 나은 경영을 위해 도구로서 철학의 문장들을 떼어다 붙이는 것을 ‘쓸모’라 말하는 철학 자기계발서의 시대에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철학의 쓸모인가? 자기계발서에는 '살아가는' 삶이 없다. 비틀고, 개발하고, 나아지려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덩어리로서의 시간들만 있다. 삶을 삶 아닌 것으로 비트는 것이 철학의 쓸모일까? 


쓸모가 있든 없든 삶은 일단 나아가야만 한다. 파비앙이 손자 레오나르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딸에게 건네준 책의 제목은 <플라톤의 비밀>이다. 아들이 묻는다. “철학은 좀 이르지 않나?” 그녀는 답한다. “이르긴 뭐가 일러.” 철학, 삶, 그리고 그 둘의 관계에 대해 내리는 각자의 대답에 따라 그녀의 말의 깊이는 달라질 것이다. 영화는 적어도 이르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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