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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May 27. 2021

읽는다는 것의 의미

마크 포스터, 스트레인저 댄 픽션(2006)

*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배제된 타협 : 줄스 힐베르트

소설 속 주인공과 소설 작가가 대립하는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에서 줄스 힐베르트는 그 안에서 유일하게 무언가를 읽는 사람이다. 영화는 자신이 비극적으로 끝나는 소설의 주인공임을 알게 된 해롤드 크릭이 소설의 작가인 캐런 이펠을 찾아나서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문학박사이자 교수인 줄스 힐베르트는 해롤드에게 들려오는 하늘의 목소리가 전지적 작가시점의 소설이라는 점을 간파한 조력자다.

그는 책을 사랑한다. 해롤드가 상담을 위해 처음 찾아왔을 때에는 옆구리에 <Poetics Today>라는 책을 끼워넣은 채였고, 물기로 가득한 수영장에서 안전 요원 일을 하는 도중에도 수 그래프턴의 <I is for Innocent>라는 책을 읽고 있다. 젖지 않도록 비닐로 싼 채 책에 탐닉하고 있는 장면은 그가 독자/평론가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읽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함을 보여준다. 


표지가 빠르게 지나가는데다 심지어 비닐로 싸 두면 보는 사람은 골이 좀 아프다.


그에게 해롤드는 자신이 주인공인 소설의 완성본을 건네주며 결말을 바꿀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는 이미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단지 '타이핑'되지 않았을 뿐이다. 해롤드의 표정은 간절하지만 정작 그 작품을 받아든 줄스의 표정은 심드렁하다. 해롤드에겐 삶이 달린 문제지만, 힐베르트에게는 읽을만한 작품인지 아닌지만 중요해 보인다.

죽고 싶지 않다는 해롤드의 요청 앞에서 캐런과 줄스의 대응은 대비된다. 캐런은 자신이 공들여 빚어낸 작중 인물을 마주한 후에 '그가 죽는다'는 문장을 타이핑하지 못하고 절규하지만 줄스는 냉정하다. 작품을 모두 읽은 다음날, 그는 해롤드를 향해 당신은 죽어야 하고, 영원히 남을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말한다. 


죽기엔 언제나 타이밍이 안 좋습니다.

해롤드 : 지금 죽을 순 없어요. 타이밍이 안 좋아요.

줄스 :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야. 해롤드, 해롤드. 내 말 들어봐. 해롤드, 자넨 언젠가 죽게 될 거야. 회사에서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고 박하사탕이 목에 걸릴 수도 있어. 장기간 투병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언젠간 분명히 죽게 돼. 이 죽음을 피한다고 해도 다른 죽음이 다가올 거야. 확실한 건 그녀가 쓴 것처럼 시적이거나 의미 있는 죽음이 되지는 못할 거란 말야. 안 됐지만, 이런 게 비극이네, 해롤드. 주인공은 죽지만 이야기는 영원히 남지. 


독자/평론가로서 걸작을 읽고픈 욕망은 타인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죽음의 의미를 낮은 목소리로 설파하는 그의 모습에서 독자의 서늘함을 마주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작 그는 해롤드 크릭의 삶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제대로 판단하는 데 매번 실패한다. 23개의 질문으로 작가군(群)을 추려냈을 때에도 그 안에 캐런은 없었다. 해롤드가 오판한 탓도 있겠지만(그는 아나 파스칼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라 오해했다가 그녀의 사랑을 확인한 후 희극의 주인공이라 확신한다) 기본적으로 독자는 오판할 수밖에 없다.

그의 말마따나 사람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을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가 말하는 순간 그 의미가 달라진다. 자신이 배우고 가르치는 완벽한 '서사'로부터 벗어나는 삶들을 과감하게 가치 없다 말하지만 정작 결말도 잘 모르는 사람이 '걸작'을 운운하며 죽으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I would prefer not to."라고 하게 되지 않겠나?

줄스는 영화의 결말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해롤드가 죽음으로써 걸작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그가 죽음을 피하고 아나와의 사랑을 이어나가는 어정쩡한 희극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줄스의 자리에서 영화를 읽으려는 사람들 역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캐런과 해롤드는 그렇지 않다. 캐런은 소설 쓰기의 윤리를 다시 고민하게 되었고, 해롤드는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게 되었다. 평론가 로저 이버트가 "엔딩은 타협이다. 그러나 영화의 타협이 아니라 전적으로 캐릭터와 그들의 결정에 따른 타협이다. 그것이 나를 미소짓게 한다"고 말했던 바는 줄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독자의 자리에서 남의 삶을 읽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것이 삶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 혹은 주인공에 대한 폭력적인 요청이 권리가 된 시대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제발 누군가를 살려주세요, 혹은 누군가를 죽여주세요 요청하며 작품과 캐릭터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제약 없이 강렬하게 발산한다. 원하는 결말로 작품이 나아가기를 강요하는 힘들이 도처에 있다. 줄스 힐베르트는 그 목소리가 차분하고 낮을 뿐이다. 영화는 결말에서 그를 사실상 배제함으로써 그 욕망을 멀찍이 떨어져 돌아보기를 요청한다. 

독자로서 혹은 주인공으로서 사람은 자신의 삶이 희극인지 혹은 비극인지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단서들을 추적하게 된다. 문제는 번번이 실패한다는 데 있다. 영화 안에서 상황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은 주인공이 통제하지 못하는 외부적인 사건이 일상에 개입하면서 만들어진다. 핵심 서사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자전거 탄 소년의 이야기와 버스 기사로 취직한 여성의 이야기는 결말 부분에서 극의 성격을 완전하게 변경시키지만, 그 전까지 이 둘의 이야기는 어떠한 형태로도 주인공들과 무관하게 진행된다.


위로 옆으로 뻗은 직선의 공간인 시카고는 크릭을 숨기기 적절한 곳이었다, 파스칼을 만나기 전까지는.


해롤드의 삶도 파스칼을 만나면서 많은 것이 뒤바뀐다. 칫솔질의 횟수를 세고, 정확한 시간에 버스를 타는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던 해롤드는 엉뚱한 이유로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파스칼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유클리드 가(街)까지 가는 버스에 파스칼이 타고, 그녀와 어색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이가 참 고르다'는 플러팅을 한다든지) 중간에 내려버리는 장면은 그가 더 이상 이전의 규칙(에 그러니까...유클리드 공간의 공리?)에 얽매이지 않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자신이 따르던 규칙에서 벗어난 후 영화관에서 웃으며 보던 몬티 파이선의 <삶의 의미>는 우연이 빚어낸 결과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이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그렇게 통제된 완벽한 삶을 읽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중간에 버스에서 내린 그의 뒤로 보이는 '드루리 레인' 극장(하필 앨러리 퀸의 추리소설 <Y의 비극>에 등장하는 탐정 이름을 빼닮은)이 암시하듯 삶이 어렴풋하게 '비극'일지라도 말이다.


- 글의 주제와 무관하게 남는, 그러나 흥미로운 단편들.


1. 수 그래프턴의 책 : 줄스 힐베르트가 읽고 있는 책은 추리소설 작가 수 그래프턴의 ABC 시리즈 중 한 편인 <I is for Innocent>다. 킨지 밀혼이라는 여성 사설 탐정이 주인공인 1인칭 추리소설인데 연작 소설을 쓴 여성 작가, 주인공이 매우 규칙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 치아에 관심이 많다는 점(해롤드가 파스칼을 버스에서 만나 던지는 ‘이가 참 고르네요’라는 말엔 이유가 있다)은 수 그래프턴과 킨지 밀혼의 관계에서 캐런 이펠과 해롤드 크릭의 관계를 유추해보는 재미를 준다.


2. 힐베르트와 대칭되는 에셔 : 하필 캐런으로부터 글을 받아내러 온 조수의 이름은 ‘에셔’다. 그에게 이펠이 만나자마자 ‘스파이’냐고 묻는 건 (줄스와 마찬가지로) 그가 현실과 소설 사이의 또다른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작품처럼, 그녀도 경계를 흐린다. 이펠과 해롤드가 서로 만나는 장면에서 해롤드에게 ‘작품을 읽어보라’고 하여 결국 해롤드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자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에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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