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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09. 2021

희미한 시선

마틴 맥도나, 쓰리 빌보드(2017)

* 영화 <쓰리 빌보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적 복수 연합 : 밀드레드, 딕슨 그리고 사라지는 매개자 윌러비

<쓰리 빌보드>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딸을 잃은 밀드레드 헤이스(프랜시스 맥도먼드)와 서장을 잃은 제이슨 딕슨(샘 락웰)의 '사적 복수'를 위한 연합 결성기를 핵심 이야기로 삼고 있다. 영화는 밀드레드가 딸을 강간하고 죽인 범인을 반 년 넘게 잡지 못하는 경찰에게 책임감 있는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시 외곽 도로변에 놓인 대형 광고판에 서장을 비난하는 문구를 게재하면서 시작된다. 경찰서장 빌 윌러비(우디 해럴슨)는 췌장암에 걸린 자신의 처지도 생각해달라고 호소하지만, 밀드레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윌러비가 아끼는 경찰관 딕슨은 광고책임자 레드 웰비(케일럽 랜드리 존스)를 압박하고, 밀드레드의 친구를 체포하며 그녀를 옭아매려 하지만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사건도, 광고도 해결하지 못한 윌러비는 투병생활 대신 자살을 택하고, 세 통의 편지를 남긴다. 


편지는 밀드레드와 딕슨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 딕슨은 서장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믿는 레드 웰비를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광고판을 딕슨이 불태웠다 오해한 밀드레드는 경찰서를 불태우고, 딕슨은 그곳에서 심한 화상을 입는다. 두 사람의 어긋난 분노는 아이다호에서 온 범죄자 앞에서 마침내 이어진다. 그를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다른 누군가의 딸을 잔인하게 죽인 죄를 범한 이방인을 사적으로 단죄하고자 그들은 총을 들고 떠난다.


결국 총성은 울릴 것이지만, 그것을 영화 안에서 보여주느냐 아니면 영화 '이후'로 미루느냐는 큰 차이가 있다. <쓰리 빌보드>는 후자를 택했다.


힘이 있는 서사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마지막 여정에 동의하거나, 마지못해 묵인하도록 만든다.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서장에 대한 비난을 그만두길 종용할 뿐, 딸을 죽인 범인을 진지하게 찾으려 하지 않는다. 법 따위는 됐고 죄인을 찾으라는 그녀의 요청은 수시로 좌절된다. 한때는 아무 조항이나 적용해서 사람을 구금하기도 했을 딕슨은, 두드려 맞으면서까지 증거를 채취한 이방인을 단죄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후에야 밀드레드의 고통을 이해한다. 안톤 체호프의 총처럼, 우리는 영화가 끝난 후 언젠가는 두 사람이 싣고 간 저 총이 아이다호 어딘가에서 발사될 것임을 안다, 혹은 믿는다. 그런데 이것을 즐겨도 되는가?


사적 복수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는, 서장으로 상징되는 법과 행정의 모순적 언행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한다. 윌러비는 물가에 아이들을 앉혀둔 채 '보고 있지 않아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한다. 그는 지켜보지 않고 아내와의 섹스에 몰두한다. 윌러비는 편지에서 항상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한다. 수사는 7개월간 진전이 없고, 밀드레드의 요구는 '인권'과 같은 단어들로 기각되었다. 딕슨의 고문 혐의를 변호하고자 윌러비는 "인종차별주의자 경찰을 다 해고하면, 동성애를 차별하는 경찰 셋만 남는다"고 변명한다. 윌러비는 그럼 인종차별주의자이거나 인종차별주의자일수밖에 없다. 그의 말엔 어디에서도 진실이 보이지 않는다.


희미한 구원의 목소리 : 웰비와 페넬로페

영화는 총이 채 발사되기 전 끝난다. 만족스러운 결말을 내리지 않음으로써(총알은 어디로 향하는가?) 우리가 그 장면을 손쉽게 즐기지 못하게 만든다. 앞서의 모든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사적 복수를 손쉽게 승인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변부로 밀려난 희미해진 사람들의 시선을 잔여로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광고책임자 레드 웰비와, 밀드레드의 전 남편 찰리의 새 연인 페넬로페(사마라 위빙)는 영화가 하나의 대답이 아니라 질문으로서 남아있을 수 있게 하는 잔여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도 성이 Red인 자가 있다.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https://youtu.be/EfbrHhkFIiw

타인에 대한 호의, 그리고 끝내 떨면서도 빨대의 방향을 돌려주는 레드야말로 세상에 드문 '좋은 사람'이다.


웰비와 페넬로페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는 사람들이다. 레드 웰비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A good man is hard to find>를 읽는다. 그는 소설 속 할머니처럼 세계에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좋은 사람임을 계속해서 행동으로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그가 입원한 병원에 실려온 환자가 실은 자신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딕슨임을 알게 된 후에도 오렌지 주스에 빨대를 꽂아 건네주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는 손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딕슨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는 복수를 행하지 않는다.


네이버 시리즈 번역은 '책'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책갈피(Bookmark)' 명언이다.


페넬로페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열 아홉살 소녀다. 분위기를 잘 읽지 못하는 순진한 사람이다. 때문에 멍청한 사람 취급도 받는다. 심지어는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마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책갈피의 명언 하나를 밀드레드에게 전달한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Anger begets greater anger" 밀드레드는 그 말을 수용하지 못한다. 책갈피는 손쉽게 뽑혀나가기에, 페넬로페의 말은 무기력하다. 그러나 그의 말만큼 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밀드레드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의도를 가진 문장은 없다. 


대답이 아닌 질문 : '행동주의자들의 정의'?

밀드레드와 딕슨의 주변엔 그들을 복수의 굴레로부터 구원할 목소리들이 있었다. 단지 그들만 몰랐다. 레드 웰비는 창문 밖으로 내던져지고, 페넬로페는 진지한 의견 교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영화는 그들의 무기력함을 숨기지 않는다. 덕분에 관객들은 아이다호로 떠나는 자동차에 같이 탈 지, 아니면 불에 타 그을려진 광고판 옆에서 지켜볼지를 정할 수 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두 사람의 목소리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무력한 사람들이 책과 가장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를 유발한다. 책은 종종 무력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지친 사람들이 도피하는 곳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의 증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복수를 손쉽게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약하지 않다. 레드는 세드릭의 도발에도 책을 언급하며 빈정대고, 페넬로페는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영화가 '포르노'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이 흐린 시선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저 차에 같이 타고 아이다호에 갈 것인지, 아니면 남아서 이 커트의 시선처럼 머물러 있을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책을 읽는 자만이 복수를 그만두거나, 복수에 관심이 없다. 책은 당신을 복수로부터 구원한다. 단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영화의 주연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당신의 자리는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마치 파울 클레의 <앙겔루스 노부스> 속 천사처럼, 거센 바람에 날갯짓조차 버거워 밀려가면서도 부서지는 잔해들을 직시하는 그런 자리,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복수의 연옥으로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야만 하는 그런 시선 말이다.


'사이다'가 셀 수록 인기를 얻는 시대다. 무기력함과 배신감은 강렬하고 빠른 복수에 대한 환호로 전환된다. 망설이는 시간은 불필요하며, 거리낌없는 망치질만이 '진정한' 복수처럼 여겨진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주저하는 사람들보단, 게으른 판단으로 정의를 확신하는 사람들이 추앙받는다. <쓰리 빌보드>는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주저하는 목소리의 자리를 내 주었다. 복수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숙고하는 사람들'에게만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행동주의자들의 정의라는 것은 결국 즐길만한 대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내게 <쓰리 빌보드>는 대답이 아닌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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