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기 팩슨, 『비바레리뇽 고원 : 선함의 뿌리를 찾아서』(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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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더욱 냉소적으로 변했다. 세상은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하며,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들을 남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끝내 서로의 가슴팍에 칼을 박아넣고 원망하며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런 세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 속에 속하고 싶지도 않아 천천히 침몰하는 쪽을 택하고야 말겠다, 하는 그런 대책없는 냉소.
새해가 되어도 뉴스엔 고통이 가득하다. 한 때 절멸의 대상이 되어 핍박받은 민족은 이제 자신의 땅을 넓히기 위해 다른 민족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리길 망설이지 않는다.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던 기자들도 눈 먼 폭탄을 피해갈 방법이 없다. 피는 피를 부른다. 보복 테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은 무의미한 전쟁을 멈추라고 호소하지만, 전쟁은 자동기계처럼 계속된다. 그저 '곤란하다'는 말만 내뱉는 정치인들의 무력한 언사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매기 팩슨의 『비바레리뇽 고원 : 선함의 뿌리를 찾아서』를 집어 든 건, 절반은 냉소하는 마음에서, 절반은 절박한 마음에서였다. 간절하게,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고 싶었다. 찾아서, 키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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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역사 내내 일종의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다고 생각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천사들의 편에 서야 할 때를 알려주는 트럼펫 소리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26)
쥐 한 마리가 죽어나가는 모습에서, 도시를 고립시키는 전염병의 징조를 읽어내는 사람은 드물다. 몇 마리가 피를 토하고 계단 위에 나뒹굴고,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면 이미 도시는 거대한 수용소가 되어 있다. 원인도 모른 채, 대책도 없이 서서히 퍼지는 질병 앞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누군가는 신을 찾고, 누군가는 타인을 저주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기약도 없이 해야 할 일을 한다.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로서 전쟁을 은유한다. 예민한 사람들은 불안함을 읽어냈으나, 끝내 모두는 2차 세계 대전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혔다. 언제 걷힐지 모르는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방향을 쉽게 잃는다.
모든 것이 지나간 후의 역사 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았는지 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의 행위를 쉽게 판단하고 비판한다. 하지만 전쟁이 1945년 여름에 끝나리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영화 <밀정>에서 염석진이 자신의 변절을 변명하면서 내뱉은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의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 올바른 길을 가고 있었던 사람들조차, 안개가 언제 걷힐지는 몰랐다. 그럼에도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언젠가 안개는 걷히고 땅바닥에 자신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는 점이다.
믿음이 예외를 만든다. 남프랑스 한 복판에 있는 비바레리뇽 고원에서는 예외가 일어났다. 알베르 까뮈가 한 때 잠시 머물렀던 그 곳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이방인을 환대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파시즘의 광풍을 피해 도망쳐 온 유대인들, 공산주의자들 같은 "반독 분자들"은 어딘지도 모를 고원이 자신을 반겨줄 것이란 믿음 하나로 이곳에 몰려들었다. 형식상 독립국가였으나 나치 독일에 협조적인 비시 정권이 이를 반길리는 만무했다. 때때로 이곳엔 경찰들과 군인들이 몰려 들어왔다. 그 때마다 평범한 주민들은 그들을 벽 뒤에 숨기고, 산으로 피신시켰다.
“상황이 안 좋을 때 선하게 행동한 공동체가 있나? 나는 기억을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저항한 사례를 조사했다. 이유는 몰라도 폭력에 저항하고 고집스레 예의를 잃지 않는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정확히 무엇을 발견할지는 몰랐지만 그것을 연구하고 싶었다. 나는 그것을 간략하게 평화라 이름 붙였다.”(17)
무엇이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가능하게 했을까? 전쟁과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에서, 이 예외적으로 보이는 사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곳에서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고 숨겨주었던 다니엘 트로크메라는 인물이 있었다. 『비바레리뇽 고원 : 선함의 뿌리를 찾아서』을 쓴 매기 팩슨의 먼 친척인 그는, 부유한 집안 배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불길한 박해의 기운에 정면으로 응대하고자 모든 것을 내던지기로 선택한다. 자기의 귀환을 바라는 부모에게, 어떤 삶을 살 지 스스로 선택했다는 편지를 보내고, 고원을 지키던 친척인 앙드레 트로크메 목사의 부름에 응답해 이곳에 온다. 지옥과 같은 곳에서 도망쳐 온 아이들을 열정적으로 교육하고 사랑한 댓가로, 그는 체포당하고 고문당한 후에 수용소에서 죽었다. 이것이 그가 꿈꾸던 미래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약속도 없이, 누군가는 선한 행동을 했다.
매기 팩슨은 다니엘과 비바레리뇽 고원의 사람들이 모두 미래에 대한 약속 없이도 이방인들을 조건 없이 환대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 고원'(책의 원제이기도 하다)에는 무엇인가 평화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건 아닐까. 『비바레리뇽 고원』은 선함의 뿌리를 찾아, 비바레리뇽 고원으로 향한 여정의 기록이자 다니엘의 선택을 훑어보는 연대기다.
1930년대 프랑스는 수많은 도망자들을 위한 도피처였다. 서쪽에서는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공화파가 국경을 넘어 도망쳐 왔고, 동쪽에서는 혁명에 실패한 독일의 공산주의자들과, 해체된 거대 제국의 유민들이 피아 구분 없이 밀려들어왔다. 집권에 성공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망쳐 온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좌우로 나뉜 프랑스 정치는 내전의 위험을 품고 있었다. 거리엔 폭력이 넘쳤고, 유럽의 정세엔 전운이 드리웠다.
1938년엔 오스트리아, 1939년엔 체코와 폴란드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다음은 어디일까? 히틀러의 총구는 서쪽으로 향했다. 1940년, 히틀러는 에펠탑 앞에서 웃음지었다. 이제 프랑스에 머무는 이방인들은 선택해야 했다. 도망가거나 죽거나. 비시 프랑스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머지 않아 영토 안에 머무른 이방인들의 목록을 세세하게 적어 내려갈 것이었다.
다니엘은 부끄럽지 않기 위해, 친척의 부름에 따라 고원으로 향했다. “제가 모험을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모험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함입니다.”(52) 비바레리뇽 고원은 고립된 곳이었다. 5천 명 남짓한 주민이 모여사는 이곳은 언어, 종교, 정치적인 섬이었다. 주민들은 고립된 공간에 숨어들어온 이들을 재우고, 먹이고, 탈출시켰다. 종교 전쟁이 한창일 때엔 위그노를, 프랑스 혁명이 엄중할 때엔 가톨릭 신부를, 때로는 식민지의 아이들과 스페인의 난민을, 그리고 유대인을 고원 속에 숨겼다. “고통받는 데 익숙했던 이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켜주었다. 원을 그리며 추는 일종의 은밀한 도덕적 춤이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67)
이방인을 환대하는 일은 어렵다. 웃는 얼굴 뒤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들은 불안을 야기한다. 나는 그들의 말을 모르고, 그들은 나를 모른다. 우리는 그들의 문화를 모르고, 그들은 우리를 존중할 줄 모른다. 그러니, 사라지는 게 편하지 않을까?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기를 선택한다. “확실히 홀로코스트 때는 대다수가 그렇게 행동했다.”(76) 합리적인 선택. 다니엘, 앙드레, 그리고 비바레리뇽 고원의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박해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영웅적인 인물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종교 때문일까?
그녀는 인류학자로서, 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구조적인 힘을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종교는 답이 되지 않는다. 그녀도 종교가 있고, 앙드레도 목사였지만 종교가 '환대'를 보증하진 않는다. “전 세계의 다른 개신교인(예를 들면 당시 독일 인구의 66퍼센트)이 전시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아주 조금만 제시해도 이 가설은 반증된다.”(101) 고원에 대한 관심이 주로 특정 종교 안에서 맴돌았단 사실은, 이 고원에서 벌어진 환대를 자기 종교의 본성으로 귀속시키려는 욕망만을 드러낼 뿐이다.
지역의 역사성과 전통 때문일까? 고립된 공간이라고 해서 환대에 모두 익숙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박해받은 경험은 또다른 박해를 예방하기 위해 움츠러들기도 한다. 고원이라는 공간이 그 자체로 '환대'를 예정하는 건 아니다. 그녀의 결론은 심심할 수도 있다. 환대를 이끌어내는 조건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오히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품는 사랑, 앞으로 일이 순리대로 일어나리라는 순진한(맹목적인?) 믿음을 밀어붙이겠다는 결의만이 평화를 자라나게 한다는 것이다.
대답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그녀는 묻는다. '우리'란 무엇일까? 각각의 사회, 사람은 내부인의 기준을 정한다. 그것은 사소한 목록들의 집합이다. 친구란 뭘까? 이웃이란 뭘까? 어떻게 생겼고, 어떤 피부색을 지니고 있을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종교를 믿으며, 어떤 문화적 관습을 따를까? 구체적인 질문들이 겹쳐지면서 진하게 드러나는 경계선이 보인다. 사냥해야 할 유대인들과 '반독 분자'의 명단을 적어 내려가던 비시 프랑스의 공무원들은 끊임없이 선을 진하고 두껍게 만들었다면, 다니엘은 망설인다. 고원에 있는 이들의 종교를 적어 내려가다 멈추고 문장을 지워버린다. 다니엘은 순수한 공동체에 대한 열망이, 자신과 사랑하던 사람들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모습을 보았으므로. 망설임은 결정적인 차이다. (오늘날 조금이라도 '한국인' 아닌 모습들을 찾아내기 위해 길고 긴 차별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까운가?)
“수용accueil”이 비바레리뇽 사람들의 기준이었다. ““누군가가 문간에 나타나고 그 사람을 집 안에 들이면 가끔은 나쁜 일도 일어나요.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러니,” 상드린이 잠시 멈췄다가 말한다. “믿음을 가져야 해요.” ... “결국에는 올바른 일이 벌어지리라는 믿음이 필요해요. 상황이 마땅하게 흘러가리라는 믿음이요.”” (275)
오늘날 비바레리뇽 고원은 여전히 난민들을 위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에서 고향과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조금씩 그 고통을 치유한다. 오래된 전통을 훼손시키는 사례들은 간간히 발생한다. 어떤 소년은 같은 처지의 소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럴 때마다 주민들은 전통을 바꿔 이방인을 문 밖으로 내쫓는 대신, 죽은 소녀의 고통에 공감하고, 여기 온 이들의 사정을 더욱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낯선 이들을 내모는 대신 '믿음'을 더욱 강하게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합리적으로 이해시키기란 난망한 법이다. 까뮈는 소설 『페스트』를 통해서 “상황이 마땅히 흘러가기를 기도하는 것은 일종의 숙달된 체념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체념 뒤에는 겸손이, 그 겸손 뒤에는 굴욕이 있다고 말했다.”(298) 어느 쪽이 더 나은 결론인지는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평화는 공백이 아니라, 힘써 만들어 내야 하는 상태라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그것은 다양한 평범한 사람들이 기약 없는 미래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올바르게 돌아가리라는 희미한 믿음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하고자 결의함으로써 간신히 만들어지는 계기다. 가장 잔인한 순간에도,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다. 우리를 선하게 행동하도록 만들어주는 '고원'은 없다. 그것은 조금 과감하게 말해, 의지 안에 있다. 어디에도 없으므로 어디서든 만들 수 있다. 의지로 모든 것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특출나지 않은 우리의 행동에서만 무언가 달리 될 가능성이 시작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이루어 낸 모든 진보가 그러하듯이, 마땅히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 이외에 아무런 보장 없이도, 그리 하고자 선택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만든다.
지금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모든 것을 낱낱이 합리성과 경제적 계산으로 분해하지 않더라도, 일단은 행할 수 있는 그 무모한 게으름을 지닌 사람들은 누구인가.
“신성한 인간은 없는 듯 보인다. 어쨌거나 땅에 묶여 있는 우리는 신성하지 않다. 특정 철학이나 생각, 종교를 지녔다고 신성한 인간인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존재하며, 그 인간이 사랑함으로써 신성해질 뿐이다. 그리고 신성한 장소도 없다. 그 어떤 국가도, 마을도, 사막도, 섬도, 심지어 고원도, 그 자체로, 그 경계만으로 신성하지 않다. 오로지 장소만이 존재하며, 그 안에 사랑의 행위가 모여 신성해질 뿐이다.”(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