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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 않은 소수적 감정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2021)

by 오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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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72898


영화 글은 계속 안 써지고, 영화를 볼 여력은 없어서 글을 쓰는 텀이 길어지고 있다. 이 에세이도 거진 한 달을 다 넘겨서 보냈다. 고민이 많았는데 글을 보내면서 마지막에 뺐던 문장들이 몇 개 좀 길게 남아 있어서 마저 주워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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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이라는 것이 꼭 가시적이고, 집단적인 형태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밝게 빛나는 뉘른베르크 광장에 모여 손을 치켜들고 집단적 광기를 전시하거나, 흑인을 나무에 매달고 그 주위를 흰 옷을 입은 채 횃불을 들고 뱅뱅 돌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이 없는 곳 - 여기보다 더욱 선진적인 곳이라고 생각하는 곳 어디든간에 - 에서 차별은 아주 사소하게, 그러나 반복적으로 깊게, '국민'의 주변에 있는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낸다.


사소함은 사실 손쉽게 걷어내기 어렵다. 사람들은 사소하다는 이유로, 행동을 저어한다. 이것까지 따박따박 따지고 들면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내가 조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을까? 나 말고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자신의 예민한 더듬이를 부러뜨리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나만 침묵하면, 세상은 예전처럼 고요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무해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종종 세상의 차별에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무해한 사람이 아니라 꽤나 불편하고 예민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욕망은 달성 가능한가? 끝내 그들은 백인이 되는 데 성공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침묵의 대가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가 아닌가? 계산에 밝은 인종이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정작 중요한 계산에서 착오를 일으킨다면, 그 칭찬마저도 비아냥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노와 불만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경험들은, 아마도 대부분의 '예민한' 당신들에겐 익숙한 일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세상이 이상하다고 질문을 던져봤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자유롭기 전엔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그의 한 언론 인터뷰 마지막 말에 이 모든 내용들이 집약되어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회사는 그 뜻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이 말이 독자의 마음에 남는다면, 이 책은 꽤나 성공한 것이다. 여전히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렇게 읽은 사람들의 수가 많기를 애원하고 있긴 하지만. 남궁인과 이슬아도 서로의 다리를 놓는데 성공(!)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일말의 희망(!)을 가져야 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의 '공감'이 이 책에서 언급된 무례한 백인 남성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종의 공격적인 해석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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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예술작품을 숙달된 기교라는 규칙에서 해방하고, 그런 다음 내용 면에서 해방하고, 그런 다음에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그 자체의 사물성으로부터 해방하여 예술작품이 삶 자체에 감싸이도록 한다. 예술작품을 박탈당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예술가의 행위뿐이다. 문제는 예술가의 규칙 위반을 역사가 "예술"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그 예술가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여성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흑인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뺑소니치고도 교묘히 넘어가는 사립학교 부잣집 아이처럼, 교묘히 넘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법자라는 뜻이 아니라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악동 예술가가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신분 때문이다. 규칙을 위반하는 악동 예술은 사실 가장 위험 회피적이며, 돈 있는 수집가라는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무한 반복되는 재탕 묘기이다."


규칙의 위반을 예술의 조건으로 삼게 되면, 예술은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배려를 받는 이들의 것이 된다. 그동안 '악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악행에 대해 용서를 받고 살아오던 예술가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웃었다. 현대 예술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예술가로 규정하는 권위는 그 해방의 결에서 비껴나 있다. 냉소적인, 그러나 평소에 너무나 '너그러웠던' 시선을 반성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 부분들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경험의 확장, 판단의 확장은 이런 곳들에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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