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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뮹뮹 Feb 07. 2017

나는 멋지게 헤어지고 싶었다

바지가 튿어지기 전까진

헤어지자는 말이 나온 건 억울할 정도로 날씨가 좋은 여름 날이었다. 쌓여있던 분노와 섭섭함이 치밀어올랐지만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헤어지더라도 얼굴이나 마지막으로 보자 라고 문자를 하고 청계천에서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상하고 후회도 되면서 복잡미묘한 생각이 들었지만 꼭 울며 불며 헤어지지 말고 멋지게 쿨하게 헤어질테다 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반의 정신준비를 하고 메이크업도 빠릿빠릿 고치고 있는데 갑자기 불현듯 들리는 투두둑 소리...

"엄마 이 바지 좀 허술하게 줄여진거 같지 않아?"

아뿔싸. 친구 집에서 버린다고 해서 "아니 이 멀쩡한걸 왜 버려" 하며 얻어온 바지가 허리가 너무 커서 줄였는데 그게 그만 튿어지고 만거였다. 이제 바지는 내가 손으로 잡고 있지 않는 이상 무릎까지 주르르 흘러내리는 상황... 이 상태로 남자친구를 만난다면 바지에다 똥 싼 사람처럼 엉거주춤 바지를 손으로 잡은 채 헤어져야할 판이었다.

남자친구가 올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나는 새로 바지를 사야할지, 집에 다시 들러야할지, 어디 수선할데가 없는지 초조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청계천 광장에 가보니 할머니들이 밭일 할 때 입을듯한 냉장고 바지만 팔고 있을 뿐... 도저히 지금 입을 수 있는게 없었다.

결국 광장에 즐비하게 들어선 텐트들마다 들러 실과 바늘이 있냐고 물어보고 있는데, 바지가 튿어진 것을 알아보고 딱하게 본 한 아저씨가 같이 합세해서 바늘과 실을 찾아주기 시작하셨다.

"아줌마 바늘과 실 읎어요?"

"아, 바늘과 실은 왜?!"

"아니 학생이 바지가 튿어졌다잖어."

아줌마가 그런거 읎어요 그런걸 왜 가지고 다녀 하며 아저씨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괜히 온 세상이 싫고 억울하고 쪽팔리고 초조하고 서러워져서 눈물이 뚝뚝 나오기 시작했다. 투둑투둑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훌쩍대기 시작하니깐 아줌마가 놀라서

"아니 학생 바지가 튿어졌는데 왜 울어, 응?" 하셔서 그 때부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 못한 채 "엉엉 남자친구랑 헤어지는데 ... 마지막으로 만나는건ㄷ... 바지가...흑흑 ㅠㅠㅠㅠ" 하며 나도 모르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왠 아가씨가 울지 하며 호기심 있게 바라보던 주변 상인 아줌마들이 갑자기 엄청난 단결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셨다.

"학생 나도 3일 전에 차였어. 세상에 널린게 남자야."

"맞아 똥차가 가야 세단이 온다니깐!"

"야 38세 되도 남자에게 차이더라. 별거 아냐 학생."

곧 아줌마들이 어디선가 지갑 만들 때 쓰는 튼튼한 실과 바늘을 가져와 바지를 수선해주시기 시작했고, 다시 튿어지지 않게 단단히 본드칠도 해주셨다. 수선하는 내내 구수한 위로를 아끼지 않으시면서. 수선이 끝나고 너무 죄송하고 민망해서 지갑을 하나 사겠다고 했더니, 좋은 남자 만나면 남자랑 같이 와서 사라며 손을 내저으셨다. 지나가는 외국인분들이 이 해프닝에 호기심 있게 다가와 서툰 한국말로 힘내요 예뻐요 하면서 눈물 콧물 닦으라고 휴지도 쥐어주었다.

가끔 전혀 모르는 사람의 위로가 더 감동일 때가 있다. 모르는 누군가가 괜찮을거야 라고 웃어주는게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정말 모든게 잘될 것 같았고 세상엔 정말 따뜻한 사람이 많고 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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