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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경 May 13. 2024

인연

하얗게 흘러가는 것이 있다. 어떨 땐 파랑으로, 때로는 빨강으로 노랑으로 물들이며 흐른다. 사람들과의 인연이 그렇게 다양한 색깔로 나를 예쁘게 물들이고 있다.

  “선생님~~~ 우리 오늘 김밥 먹어요~~~” 밝은 하이톤의 그녀가 활기차게 다가온다. 

그녀와 나는 김밥을 좋아한다. 강릉 끝자락에 있는 주문진을 들어가기 전에 ‘영진’이라는 바다가 있다. 그 주변 어딘가에 우리의 근무지가 있었고 나는 면접관으로, 그녀는 면접을 보기 위해 그곳으로 왔었다. 

  그녀의 싹싹하고 밝은 목소리 그리고 얼굴 전체가 함박웃음으로 물든 그녀를 보는 순간 내 마음도 함께 발그레 물들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도깨비 촬영지로 알려져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지만 그녀와 나에겐 서로를 처음으로 바라보던 곳이다.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자기주장도 강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 들어왔지만, 늘 빛나던 그녀는 각양각색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 사이로 그녀만의 친근함과 발랄함으로 어느새 스며들어 한 사람의 몫을 든든하게 해내고 있었다. 

  그날도 근무가 끝나고 저녁을 김밥으로 때울까 싶은 마음에 김밥가게 앞에 섰는데 누군가 “샘~~”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김밥을 사러 그녀가 왔다. 누군가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하지만 난 벚꽃 터지는 듯한 톡톡 튀는 목소리가 좋다. 그녀는 그런 목소리로 다가와 사람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김밥은 종류가 수도 없이 많다. 돌산갓묵은지김밥, 진미채김밥, 땡초김밥 등 얼핏 보기엔 그 재료가 김밥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과 밥과 함께 어우러지면 그것들은 각자의 맛을 조금 감추고 다른 것들과의 궁합을 찾아간다. 그래서 의외지만 갑작스런 즐거움이 입안에서 터지곤 한다. 이처럼 그녀는 사람들 사이로 쏙 들어와 다른 이들과 잘 섞여 지내면서 독특한 그녀만의 향기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렇게 이어온 날이 벌써 십 년이다. 때로 화를 토로하고 때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슬픔을 소나기처럼 흐르게도 한다. 또 벅차게 기쁜 날엔 활짝 핀 작약 같은 미소로, 업무적으로 치여 힘을 없을 땐 털이 깎인 할미꽃마냥 고개를 떨군 채 내 옆에 앉아있다. 우리 지금처럼 잘 지내요~~ 하는 목소리는 공간에 흩어진다. 그 순간 비단으로 바위를 깎아내는 세월만큼 긴 인연을 바래본다.

  내 옆에 있는 이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오랜 인연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학창 시절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 김치볶음밥을 같이 해 먹던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잘살고 있음을 몸으로 느껴지는 사람, 또 누구는 학교생활에서 스트레스받게 하는 교장 선생님의 흉을 함께 본 의리로, 학생들이 너무 억세고 말썽을 자주 일으켜서 매일 방과 후에 앉아서 풀어갈 방법을 찾아내느라 끙끙댄 시간이 켜켜이 쌓여서 지금까지 만나는 이들이다. 늙어서 무언가를 배운답시고 갔던 곳에서는 옆자리에 앉아 공부했다는 것만으로 반갑게 품어 앞으로의 계획을 함께 그리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같이 여행 갈 것이라는 이유로 아프지 않도록, 힘들지 않도록 체력 관리해주며 서로를 지키고 감싸는 마음으로 곁에 있어 준다. 아들 녀석의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으로 만났지만 지금은 친구가 되어 팔도강산 유람을 같이하는 동지로 있기도 하다.

  나 한 가닥, 너 한 가닥, 우리 한 가닥, 그렇게 짜다 보니 얽히고 설킨 인연들로 오방색 고운 오색천이 되었다. 오방색은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고 도움을 주기도 하고 물리치기도 하고 낳아주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떨어져 있으면서도 유지한다고 한다. 우리는 자고 먹고 즐기는 속에 서로를 의식하고 인정하고 도와주고 수용하며 산다. 날마다 날마다 새로이 짜여가는 나의 일상이 우연과 필연으로 만나 인연으로 이어지고 점점 더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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