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7. 당신은 어떤 일에 몰입하나요?
몰입: 어떤 일이나 활동에 완전히 집중하여 다른 생각이나 감정은 잊은 채 빠져드는 상태.
작년 이맘때쯤, 나는 달력 만들기 그림에 몰입해 있었다.
방에서 혼자 공부하면 오히려 집중이 안 된다는 첫째 아이의 책상을 거실로 옮기고, 나도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일을 했다.
나는 디지털 드로잉으로 달력 그림을 그렸다. 처음 써보는 기능들이 많아 하나씩 익혀가며 그려야 했기에 작업은 더디고 오래 걸렸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꼭 필요했다.
좋지 않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럴 때면 펜을 쥐고 화면 앞에 앉았다.
그림에 집중하는 동안만큼은 생각이 조용해졌다. 몰입은 나를 잠시 구해주는 은신처 같았다.
어쩌면, 감정의 쓰레기를 조용히 쓸어내는 청소 같기도 했다.
둘째 아이가 여행을 떠나는 날이면(둘째는 ‘재미난학교’라는 대안교육기관에 다닌다.)
나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그림 앞에서 보냈다.
덕분에 달력 그림은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되었고, 스티커와 키링 같은 작은 악세서리까지 만들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냈다.
올해는, 부디 몰입의 시간이 필요 없는 한 해이길 바랐다.
무언가에 깊이 빠지지 않아도 마음이 괜찮은 날들이 이어지길, 특별히 붙잡지 않아도 하루가 무심히 흘러가길 바랐다. 하지만 마음이란 게, 인생이란 게, 늘 뜻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나는 또다시 나를 붙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올해의 은신처는, 텃밭.
봄부터 시작한 텃밭 농사에 나는 다시 몰입하기 시작했다.
작은 모종이 쑥쑥 자라 커다란 잎이 되고 어느새 또 싹이 트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바라보며, 바쁘게 지내는 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일들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별일이라 여겼던 일들이, 별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일같이 물을 주고 돌보는 내 텃밭보다 가끔 들여다보는, 뒤쪽의 제대로 관리도 안 되는 텃밭 작물들이 더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있었다.
사람이건 식물이건, 지나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한 관심이 필요한 건가.
올봄, 처음 심어본 감자는 내 정성이 지나쳤다.
수확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줬다. 잘 자라라고, 매일 물을 줬다.
하지만 막상 수확해보니, 감자의 절반이 조금씩 물러져 있었다. 꽃이 피고 난 뒤에는 물을 매일 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매일 물을 주러 가는 나에게, 엄마는 “감자는 물을 자주 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더 잘 자랄 거라 믿으며, 매일 물을 줬다.
아이들에게도 그러지 않았을까.
작년, 첫째 아이와 자주 대립하던 시기.
아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왜이러는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알겠는데도 다 싫어.
내 자신이 너무 싫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그런데 그러지도 못하겠고,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마음이 안 움직여."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무심할걸, 조금만 못 본 척할걸. 조금만, 그냥 바라볼걸.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어렵다, 어려워.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