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에 관하여,라고
찬바람이 불며 콧속을 찌릿하게 후비는 계절이 옴으로해서 N연차 비염인은 아침마다 세수대 앞에서피 섞인 콧물을 흥, 흥 흘려보낸다. 좀 더러운 말이겠으나 건더기가 제대로 나올 때 콧속으로 훅 들어오는 바람을 느낄 땐 후련하고 시원하다.
남편이 보지 못하게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등을 돌린 채로 마른 코를 후비다가 어쩌면 그가 이미 다 보고 있을지도 모른 생각이 퍼뜩 들어 혼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머리를 뽑는 습관이 생긴 이후로 자다가도 머리를 뽑아내곤 했는데-마치 살풀이하듯 우아하게-말리면 허공에서 팔이 멈추고-혹시 이 더러운······되도록이면 평생 혼자만 알고 싶은 이 은밀한 짓을······한밤중에 자다가도 하는 것 아닌가 하는······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의심이 든다.
비염인에게 잔인한 이 계절 10월은 6개월 휴직을 약속한 이 사노비가 회사로 돌아가야 할 때이기도 하다.
올해 초 3월에 휴직에 들어갔어로 이번 10월을 끝으로 복직을 해야 한다.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이냐 하면······'이 걸 제가요?' 하고잔뜩 날을 세우고 일을 경계하는 5년 차의 무치(無恥)와 '이걸 제가요?' 하는, 일을 할 줄 모르는 새하얀 백지상태의 신입의 후안(厚顔)이 합쳐진 바로 '후안무치'한상태일 것이다.
6개월간의 휴직기간 동안 업무감각이 새까맣게는 아니지만 애매한 정도로 남아있기 때문에 일을 하다 보면 삼분당 한 번씩 저기······이거 어떻게 하는 거였죠, 하며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을 도리밖에는 없다는······
안타까운 미래가 벌써부터 그려지는데 나는 그런 나의 한심함을 영 견디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골머리를 썩을 가능성 또한 높은 확률로 점칠 수밖에 없다는 것······.
무슨 일 하세요, 는 소개팅에서 흔하게 주고받는 멘트는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오히려 숱하게 해 봤지만-예능 나는 솔로를 보면서 나를 소개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길거리를 걸으며 혼잣말을 해보곤 했다.
'대기업'이라는 말은 꼭 넣어야 하고, '유통'이라는 말을 넣을까 말까, 아, 대기업 앞에 회사를 유추할만한 알파벳 하나도 꼭 넣어야겠지, 광고 겸 예산집행 겸 이벤트기획 겸 마케팅 겸······중 해본 일 중 가장 그럴듯한 직무 하나를 골라 말한 다음에,
눈이 오면 눈도 치우고, 의자랑 테이블도 나르고, 카트에 대형배너를 싣고 끌고 다니기도 하고, 사람들 간 싸움에 끼어서 양쪽에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시키는 일과 자초한 일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어요······라고.
이번 휴직은 병가였으므로 복귀하기 위해선 완치했다는 진단선을 내야 단했다. 글쎄, 공황이나 우울증 같은 병에도 완치되었습니다, 하는 진단서를 떼주는지는 모르겠다(약을 더 이상 먹지 않으면 완치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완치되었다, 고 하면 없던 일이 되는 건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가 되는 건지? 이럴 땐 묘하게 억울하기도 하다.
돌아가면 사람들이 날 두고 이러쿵저러쿵 수군댈지도 모른다. 일부러 업무에서 배제시키거나, 쟨······이렇고······저런 애니까······하고 기피할 수도 있지, 이런 걱정을 안 해본 건 아니고. 만약 걱정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아무도 나한테 막중한 업무를
(애초에 회사에서 하는 모든 일을 막중하게 여긴 적은 없는데, 오히려 내가 회사일을 엄중하게 대하는 태도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안다면 그건 너무 부끄럽고 치욕스러울 테다)
안 맡기고 날 타박도 안 한다면, 그럼 집엔 빨리 돌아가고 월급은 받던 대로 받는······그런 걸 좋다고 할 수 있나. 그렇게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건 좋지 않다. 그건 확실하다.
······그런 걸 버틸 만큼 월급을 많이 안 준다.
어제는 악몽을 꾸었기 때문에 엄마-소리 지르며 깨어났다. 꿈에서 깨고도 꿈을 생생히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되었다.관람열차를 탔는데 나 말고도 일행이 두엇 있었고, 그 일행 중 한 명이 갑자기 내게 다가와 날 여기저기 쥐어박기 시작했다.
나는 몹시 억울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대갚음을 하고 싶어서 종종거리며 다녔는데 날 도와주기는커녕 좋게 넘어가자-는 남편한테 화가 났고 내가 저이를 고소했는데 저이가 내게 앙갚음하려 들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들어서 고소가 망설여졌고,
꿈의 말미에서야 아니, 진단서부터 끊고 CCTV부터 확보했어야 하지, 하는 그나마 현실적인 해결방법이 생각나기 시작했고, 어쩌지 못하는 억울함과 답답함에 엄마-소리 지르며 깨어났던 것이다.
남편의 가슴을 콩콩 때리며 왜 날 외면했냐, 고······따진 다음에 남편의 품에 안겨 다시 잠이 들었다.
······이 꿈이 복직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과 관련이 있나?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오늘 아침에 전회사(전회사 아니라니까)에서 같은 부서에 있던 과장님한테 날이 갑자기 추워졌으니 감기 조심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과장님이 나랑 비슷하게, 혹은 나보다 더 지독한 비염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에겐 비염을 조심하라고 답장했다.과장님은 전에도 몇 번 했던 질문-돌아올 거니?-을 다시 한번 물었고
(사실 이 질문은 과장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이미 여러 번 들었는데)
예, 다시 가지요, 하고 별 슬픔 없이 답했다. 끌려간다거나······죽어도 돌아가기 싫어서 바닥에서 냅다 윈드밀을 돌 것 같다거나······그런 기분은 아니라는 생각이다.(확실히 그런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다)
내게는 이제 회사 말고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몇 개 있고, 그걸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뭐든 미루고 닥쳐서야 하는 기질 탓에 걱정마저도 미루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안 좋은 일을 마지막에서야 한다면, 스테이크를 먹는데 접시 위에 올라온 재료 중 아스파라거스를 제일 싫어하고, 그런데 거기 있는 건 모조리 남김없이 먹어치워야 하는 상황에서, 아스파라거스를 제일 먼저 먹어야 하는지, 제일 나중에 먹어야 하는지?
아스파라거스를 스테이크와 같이 중간중간 곁들여서 마지막에는 스테이크와 아스파라거스를 동시에 없애야 하는지······아무려나 지금은 별 생각이 들지 않는데 사서 걱정을 해야 할 필요가 뭐야, 싶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