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의 굵기에 대한 디자이너의 생각
나는 꿈을 1년 365일 중에 360일은 꾼다.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꾼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꿈꾸지 않고 깊이 자는 게 소원이다.
내 꿈은 현실을 기반으로 펼쳐진다. 현재 내가 일에 파묻혀 예민한 시기라면 꿈속에서 나는 그 일을 망쳐 망연자실하고 있다. 불안과 걱정이 빚어내는 꿈이다. 꿈에서 먹고 싶던 음식을 먹기도 하고, 가고 싶은 여행지에 가기도 한다. 대개는 자고 일어나면 잊히는 개꿈이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꿈속에서 느낀 불안과 환희와 반가움 등의 감정만이 생생히 남는다. 어차피 잊힐 꿈이라면 잠이라도 깊게 잤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하도 오래된 수면 습관이라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오늘은 어떤 꿈을 꿀지 기대하며 잠들기도 하고.
지난주에 재밌는 꿈을 꾸었다. 서체의 black으로 로고를 만드는 꿈이었다!
서체는 ultra light, thin, light, regular, medium, bold, heavy, black, extra black 등의 명칭으로 굵기를 나눈다. regular는 한 서체의 기준 굵기이다. 보통 본문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게 regular이다. 그리고 로고에는 regular, medium, bold를 주로 사용한다. light는 글자가 얇아 로고로서의 무게감이 다소 떨어지고, 로고를 작게 사용했을 경우 스크린 상에서 생략되어 보이거나 인쇄 시 오류가 생길 수 있다. 요즘에는 워낙 스크린 해상도와 인쇄 기기가 발달하여 그럴 위험이 크진 않지만 만약의 경우도 늘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얇은 서체가 어울리는 브랜드에는 light와 같은 굵기를 로고에 사용한다.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의 브랜드에는 얇은 서체가 어울린다.
디자인에 자주 사용하지 않는 굵기가 ultra light, thin, heavy, black, extra black이다. 너무 얇고, 너무 두꺼우면 잉? 과한데 싶다.
그런데 꿈속에서 내가 black을 로고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깔쌈하고 멋진 로고였다.
black은 서체의 굵기 중 가장 두꺼운 것을 말한다. (그 위에 extra black도 있긴 한데 extra black이 포함되지 않은 서체도 간혹 있기에 black을 가장 두껍다고 표현함) black은 로고로 쓰기에는 너무 두껍다. 서체의 안과 밖이 꽉 찬 글씨는 숨 쉴 틈 없이 답답하다. 서체 고유의 형태와 아름다움이 보일 틈이 적다. 글자가 너무 두꺼워도 번지거나 실선이 생기는 등의 오류가 생긴다. 디자인할 때 실물 구현시 발생할 변수를 늘 고려해야 한다. 인쇄 기기, 인쇄소가 내 기대와 같지 않다. 디자인이 타자기 몇 번, 마우스 몇 번 클릭하면 뚝딱 만들어지는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ㅠㅠ
그런 내가 black을 로고로 쓰다니! 이건 내 편견을 깨는 꿈이었다. 지금까지 열거한 로고에 대한 이론, 쓰임에 대한 고려로 인해 black을 로고로 사용해야 탁월한 상황에도 난 블랙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있다. 편견에 사로잡혀 black만이 가진 매력을 평가절하하는 상황이 온다면... 안돼! 끔찍하다. 그럴 때 black은 꽉 차서 답답함이 아닌 꾹꾹 눌러 담은 엄청난 밀도의 힘을 상징한다. 디자인이란 참 상대적이다. 말하기 나름이고 상황 봐가면서 써야 한다. 디자이너는 눈치가 빨라야 하는 직업이다.
YG의 프로듀서 테디가 투애니원의 Fire을 작곡할 때 잠깐 낮잠을 자는데 도입부의 멜로디가 꿈에서 들렸다고 한다. 따다당 따다당 따다다당. 자신의 분야의 한 경지에 오르면 꿈에서도 영감을 받는 법인가! 꿈에서 서체를 만드는 경지에 올랐다. 이런 꿈을 꾸는 밤이라면 깊이 자지 못해 피곤해 깨는 아침에도 상쾌하다. 어는 날 black을 로고로 사용할 브랜드를 만나면 신기하겠다. 이거 예지몽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