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누구일까?
마르크스 하면 무엇이 떠올려지는가? 처음에는 가물가물하게 그의 업적이 기억나면서도, 모호했다. 단지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인물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달까. 마르크스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여러 경로로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처음에 마르크스를 접하였던 것은 ebs 4강 자본주의와 책에서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노동자들의 삶을 위하여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한 철학자’라는 등 주로 긍정적인 면이 나와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인터넷이나 다른 영상에서는 마르크스에 사생활과 모순에 대하여 주로 나와있었다. 그곳에서 마르크스는 내가 첫 번째 공부로 마르크스에 관하여 가지고 있었던 좋은 인상과는 좀 다른 마르크스의 사생활이 나와있었다. 마르크스의 모든 면들을 알 수는 없겠지만 우선 마르크스의 업적에 관하여 알아보자.
편집장직 사임, 그리고 엥겔스와의 만남.
1843년 독일 쾰른, 마르크스는 급진적 반정부 신문인 라인 신문의 편집장이었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 경제적, 좀 더 나아가자면 ‘정치 경제적인’ 이슈로 방향을 전환했다. 하지만 기사가 검열당했다. 당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에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광고 문구와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가 독수리(프로이센)에게 괴롭힘당하는 그림으로 저항했다.
라인 신문이 폐간되고, 마르크스는 자유의 도시 파리로 간다. 그는 그곳 카페 드 라 레장스에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만나게 되었다. 하나는 공산주의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정말 훌륭한 사상가라고 생각했고, 그는 사회주의의 후원자여서 마르크스가 계속 쓸 수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마칠 때까지 계속 돈을 보냈다.
두 사람은 맨체스터 방직공장 등 많은 공장에서 어린아이들이 매일 12시간 이상 일하는 것에 문제를 삼았고, 둘의 많은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파리에서 비참한 노동자의 삶을 보기도 하였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조직과 만나게 되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점차 혁명적인 공산주의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는 엥겔스와 함께 계급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혁명을 준비했다.
공산당 선언 발표
1848년 드디어 두 사람은 공산주의자 동맹에 강령을 밝히는 선언문을 쓰게 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가 잃을 것이라고는 단지 자신의 사슬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런 내용을 담은 유명한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의 선언이 출판된 1948년은 혁명의 폭풍우가 휘몰아쳤고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는 붉은 박사라는 악명과 인류의 해방을 가져올 새로운 사상을 창조했다는 명성을 동시에 얻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는 잇따라 추방령이 내려졌다. 결국 그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마르크스는 영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 궁핍한 생활은 5년 동안 지속됐고, 마르크스는 6아이 중에서 3아이를 잃게 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집필
이후 마르크스 가족은 유산과 엥겔스의 기부금 덕분에 작은 연립주택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생활이 안정되자 드디어 자본론의 집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낮엔 대영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주말엔 소풍을 가거나 다른 독일 이민자들과 교류했다.
그가 자본론을 쓴 이유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본론 일권에 위의 세 번째 그림에서 나오는 ‘잉여가치’에 대해서도 말했다. (헷갈린다면 세 번째 그림을 다시 보고 오라)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노동시간들로 이윤을 남기고 일당을 더 주지 않는다. 노동자에게 더 오래 일하게 하고, 임금을 올리지 않으면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로 더 많은 부를 얻게 된다고 지적했고 이렇게 노동시간의 연장으로 만들어지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 하는 자본가의 이기심 때문에, 기계가 계속 노동을 대신하면 실업자가 증가한다고 말했다. 그럼 ‘일하려는 사람이 더 많아져서 임금은 더 낮아지고, 그럼 상품이 쏟아져 나오지만 팔리지 않으니 기업도 자본가도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자본주의의 위기인 공황이 시작되고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고,
자본주의가 붕괴되며 사회주의가 등장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였다.
마르크스의 이면
마르크스가 분명 위대한 사상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회주의의 언급으로 인해 비판하는 사람이 무수히 있고, 공산주의 국가들도 몰락되어서 그렇게 판단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르크스는 ‘착취하는 시스템’을 처음으로 이해했으며 상품에 대한 정의,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비판 등을 하였고, ‘노동자들의 삶’을 생각해서 이 시스템들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대한 사상가’라는 말이 곧 ‘위대한 사람’이라는 말과는 동일시될 수 없듯이, 이 위대한 사상들에 비하여 사생활들은 그렇게 위대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삶과 자본가의 행동을 비판하고, 부르주아적인 삶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부르주아적인 삶을 추구하고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멀리했기 때문이다.(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문 편집장 등을 하긴 하였지만 대부분의 삶을 엥겔스의 후원과 다른 곳에서 받은 유산으로 살아갔으며 여기저기 돈을 빌리고, 많은 외상을 지니며 살아갔다.
단편적인 짧은 예시를 들자면, 프랜시스 윈 ‘마르크스 평전’에서(?) 마르크스는 자본가와 귀족들을 비판하는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부인이 독일 명문가 딸임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고 나온다. 또한, 스스로를 근검절약하는 삶을 거부했고, 아내가 아내의 ‘신분’에 걸맞은 상류계급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슬프게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자녀들만은 상류계급과 어울리게 해주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무한정 구걸하기도 했다. 물론 많은 돈은 마르크스 스스로 번 돈이 아닌 유산이나 엥겔스의 돈으로 이루어진 소비였고 말이다. 그것 외에도 분수에 안 맞는 남의 돈(주로 엥겔스 돈)으로 하는 여행, 옷, 집 등을 소비하였고 말이다. 실제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가난’은 절대적 가난이 아니라,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상대적 가난’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또, 그는 가정적으로서도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바람을 피우고, 안타깝게도 6명의 아이에 3명의 아이가 이른 나이에 죽었다. 나머지 세 명 중 몇 명은 자살을 하였으며, 부인도 그를 ‘나쁜 아버지’라고 비난하곤 했다. 심지어 행간에는 마르크스는 2명의 사생아 아이들이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마르크스의 거의 보호자 급인 엥겔스는 ‘자신의 아이’라고 실드를 치려고 했다는 말도 있다.
사상적으로 많은 업적을 이루었고, 업적과 다른 그의 실제 삶. 물론 그의 실제 삶이 그랬다고 해서 그의 업적들과 성서보다 더 많이 팔린 책들, 그리고 영향을 미쳤던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사상과 달라 불편한 사생활 또한 사라지지는 않으며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사생활과 사상 중에서 본받을만한 점 한 가지에 집중하면 어떨까?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려 하고,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들려는 마음’ 정도만 말이다.
출처 :
- ebs 자본주의 다큐프라임 4부 세상을 바꾼 철학자들
- 위키백과
- 프랜시스 윈 저, 정영목 역, 『마르크스 평전』, 푸른 숲, 2001.06.15
- 이사야 벌린 저, 안규남 역,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미다스북스,
- 욜렌 딜라스-로세리 저, 김휘석 역,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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