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지각생
버스에 올라탔다. 바깥 풍경을 잘 보기 위해 맨 앞자리를 택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광역버스 같은 버스인 듯싶었다. 약간 어둑어둑해지는 바깥이 사뭇 멋들어졌다. 더 이상 햇빛도 내리쬐지 않아 피부나 시야를 자극할 만한 어떠한 요소도 없이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여유를 누리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기사님 역시 여유를 아시는 분인지 매우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내부순환로 같은, 하지만 그것보단 좀 낮은 고가도로? 비슷한 도로를 이용하는데, 앞에 차가 한 대도 없어도 속도는 60으로 요지부동이었다. 미래에 자율 주행하는 버스를 타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속도 변화 없이 그대로 쭉 나아가는. 뭐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야 나도 급할 게 없으니. 우린 그렇게 함께 여유를 누렸다.
차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예쁜 듯 아닌 듯, 오묘했다. 그리 예쁘진 않은데 계속 눈길이 가는 그런 사람, 딱 그런 풍경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데 뭔가 담아두고 싶은, 자꾸만 보게 됐다. 차도 슬금슬금 가고 있겠다 제법 운치 있는 청승을 떨었다.
하지만 기사님은 운전 스타일만큼이나 말투도 차분했다. 문제는 너무 차분한 나머지 뭐라는지 잘 안 들렸다는 것. 한국에서야 버스 한 정거장 놓치면 다른 버스 타고 오면 되지만 외국이고, 외진 곳이라 고생을 사서 하고 싶진 않았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개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내가 내릴 곳을 듣게 됐고, 맨 앞자리인 만큼 당당하게 내렸다. 하차 태그도 해야 하는지 몰라서 뻘쭘하게 버스에 다시 올라탄 건 좀 가오가 상했지만, 그래도 내릴 곳을 놓치지 않은 게 어디인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뭔가 자꾸 빼먹은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버스에 뭘 놓고 내렸나? 그건 아니었다. 물건 산 걸 놓고 왔나? 산거라곤 탈수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들고 다녔던 아쿠아리스뿐이었다. 버렸다. 여행기간 동안 분신과도 같았던 아펜쳐 모자는 쓰고 있나? 얹혀있었다. 안경잽이라 선글라스를 쓸 수 없어 갖고 다니던 클립은? 가방 안에 오케이. 대체 뭐지? 그러던 와중 에어비앤비 메시지가 도착했다.
"Where are you now? What time will you back?"
그랬다. 시코상이 저녁때 자기 친구들과 반주를 함께 하자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 7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이미 7시가 넘었었다. 더군다나 전 날과 다른 길이었기 때문에 가는 법도 서툴러 구글 지도가 일러준 10분보다 늦을 것만 같았다. 일단은 메시지를 읽씹 하고 빨리 걸었다. 메시지로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에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해도 거의 넘어가 길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에게 맥주를 선사하기 위해. 고지가 눈앞이었다. 도달하면 맥주와 음식을 영접할 수 있다. 그 기대 하나로 날랜 걸음으로 숙소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