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무대가 된 그 곳, '훈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풍경’. 처음 파키스탄 훈자밸리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들었던 생각이었다. 마을 어디에서나 히말라야 산맥을 또렷하게 마주할 수 있고,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친절이 마을 곳곳에 녹아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마을, ‘훈자’. 이곳에서 보낸 수 개월의 시간은 아직도 내게 인생 최고의 순간들로 기억되고 있다.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길은 다양하다.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실크로드를 타고 파키스탄 북부로 들어가거나 인도 펀잡주에 위치한 국경도시 암리차르를 거쳐 육로로 가거나, 혹은 비행기를 타고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로 직접 들어가기도 한다. 삼면이 국경으로 둘러 싸여져 있는 만큼, 파키스탄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하지만 꿈의 도시 ‘훈자(Hunza) 밸리’로 오르기 까지는 엄청난 인내와 수고를 견뎌야 한다. 훈자는 다양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파키스탄 북서쪽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현지 사정에 따라 훈자에 오르는 길 자체가 일시적으로 봉쇄되는 일이 빈번하다. 일시적으로 막힌 도로가 언제쯤 다시 열리리라는 것은 파키스탄 내의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때문에 발만 동동 구르며 다른 도시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다반사다.
처음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들어와 부푼 기대를 안고 훈자로 오르는 버스를 예약하러 버스터미널로 갔을 때, 운 나쁘게도 훈자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깃(Gilgit)’이라는 도시에서 큰 분쟁이 있었다. 종교적인 문제로 항상 갈등을 겪고 있는 파키스탄 사정이야 원래부터 잘 알고 출발했던 것이었지만, 막상 버스터미널 앞에 도착해 직원에게 ‘당신은 절대로 훈자로 올라갈 수 없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언제쯤 길이 풀릴지를 물어봐도 대답은 ‘인샬라’, 아랍어로 ‘신의 뜻대로’라는 뜻의 말을 반복하기만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환상의 마을을 바로 눈 앞에 두고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사설 지프를 빌렸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여행자들을 더 모아 지프 비용을 분담했고, 새벽 4시에 이슬라마바드에서 출발해 꼬박 18시간을 달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훈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훈자는 크게 ‘알리아바드(Ali-abad)’와 ‘카림아바드(Karim-abad)’로 나뉘어져 있다. 관공서나 도매상, 버스정류장 등은 모두 알리아바드에 위치해있고, 알리아바드에서 차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와 레스토랑들이 밀집해있는 카림아바드가 위치하고 있다. 두 개의 작은 마을과 함께 사면이 모두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 싸여져 있는 훈자의 신비한 풍경은, 이곳을 무대로 탄생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보았던 광활한 초원의 풍경과 꼭 닮아있었다. 세상의 일들 따위는 멀리 내팽개쳐두고, 하루 종일 눈이 곱게 내려앉은 히말라야 산맥만을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할 정도로 훈자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처럼 만일 이 세상에 ‘푸른 달빛 골짜기’라 불리는 샹그릴라, 비밀의 초원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설산의 풍경과 마을 곳곳을 수놓고 있는 푸른 나무들의 향연. 무엇보다 이를 더욱 밝게 빛내주는 것은 훈자 사람들의 친절, 그리고 따듯한 마음씨였다. 1년 365일 훈자의 방문객들을 웃음으로 맞아주는 훈자 사람들의 환대는 이미 여행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남아있다. 산책을 하거나 트레킹을 하기 위해 마을을 어슬렁 거리다 보면 맑은 눈빛과 수줍은 웃음을 보내는 훈자사람들과 자주 마주치곤 했다.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방인인 나에게 마치 오래 전에 만난 친구처럼 ‘앗살람-알레이쿰’이라는 따듯한 인사를 건네는 그들의 친절은 나의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훈자의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곳에서는 범죄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다른 도시처럼 삼엄한 경비를 자랑하는 경찰이나 군인도 볼 수 없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살구, 아몬드, 석류 등의 과일들이 잔뜩 열려 있었고, 그 밑에 앉아 떨어진 과일들을 주워 담고 있으면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곁으로 다가와 나무 위에 열린 과일들을 따서 건네곤 한다. 훈자의 모든 식당은 직접 재배한 신선한 야채들과 향신료를 사용하고 있었고 각자 고유의 조리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매일 다른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가끔 감자를 캐는 일을 도와주거나 수레를 끄는 걸 도와주게 된다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어김없이 답례 선물을 건네곤 했다. 그렇게 정을 주고 받으며 쌓인 갖가지 선물과 음식들로 인해, 훈자에서의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훈자에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이슬라마바드로 내려가리라 생각했던 처음의 계획은 훈자에서 머무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침 안개를 걷으며 일어나 뜨거운 차를 마시고, 마을의 수로를 따라 돌아다니다가 저녁노을이 내린 이후 숙소로 돌아와 촛불을 켜고 옥상의 별을 바라보는 시간까지,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경이로운 나날들이었다.
시간이 멈추고 바람도 쉬다가는, 자연 그대로의 여유가 허락된 훈자밸리.
‘지상낙원’은 바로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훈자 여행 전에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주의사항]
1. 훈자가 위치한 파키스탄은 2011년까지는 인근 국가인 인도, 네팔, 스리랑카 등지에서 외국인 여행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지만, 현재는 여행자 자신의 국가 외의 다른 곳에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비자가 없으면 입국 자체가 불가하기 때문에 반드시 출발 전 한국에서 비자를 받아가야 한다.
2. 훈자는 파키스탄의 다른 도시들보다 외국인의 출입이 잦은 만큼 개방적인 성향을 띠고 있지만, 이 곳 역시 파키스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파키스탄은 독실한 이슬람 국가로 여행자들이 복장의 예를 철저하게 갖추어야 하는 곳이다. 파키스탄을 여행하기 전, 이슬람국가에서 지켜야 할 예절에 대해 반드시 공부하는 것을 추천한다.
3. 파키스탄의 정세는 과거나 지금이나 상당히 불안한 편이다. 훈자는 다른 도시의 사건사고가 먼 나라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지만, 훈자까지 올라가는 길은 그렇지 못하다. 또한 한국에서 여러 언론들을 통해 습득한 파키스탄의 정보와 파키스탄의 실제 상황은 매우 다르다. 일단 파키스탄에 도착하면 현지인들, 혹은 파키스탄 거주 한국인들을 통해 여행예정도시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좋다.
4. 파키스탄을 여행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 마음의 여유다. 파키스탄에서는 버스, 기차, 비행기 등 교통수단들의 변수가 심하고 운행시간도 대부분 제 각각이다. 때문에 여행일정을 빠듯하게 잡고 움직이다가는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만약 파키스탄 여행에 열흘 정도의 시간을 투자할 예정이라면, 앞뒤로 하루 정도는 더 여유를 두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