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청정 지역 홋카이도(북해도)
북해도의 공항에 도착하기 직전, 비행기 창문 너머로 끊임없이 펼쳐지는 새하얀 눈밭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한국에서 불과 두 시간 반 남짓의 거리, 하지만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설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지구 반 바퀴 뒤의 머나먼 나라에 온 것만 같은 착각에 몸을 맡긴다. 하얗게 눈을 입은 북해도의 모습은 마치 온 세상의 겨울을 품에 안은 듯,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1년 365일 서늘하고 쾌청한 날씨의 연속인, 일본의 청정지역 ‘북해도’. 처음으로 북해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를 통해서였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눈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아주 조용하게 미끄러져 눈과 함께 포개지던 <러브레터>의 주인공,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아련하고 간절한 사연들이 가득하게 녹아들어있는 <러브레터>를 보며, 그 사연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설원, 북해도의 겨울 풍경을 동경하게 되었다. 영화의 여주인공인 ‘히로코’가 죽은 연인을 그리며 목놓아 외치던 말, ‘잘 지내시나요(오겡끼데스까)’, 그리고 그녀의 외침과 눈물을 조용히 끌어안던 하얀 눈밭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저 마법 같은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 세상을 잊은 듯 소복이 쌓이는 눈과 하염없이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게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다.
이토록 오래전부터 마음속 깊이 품어왔던 겨울의 북해도를 향한 동경은, 북해도의 신 치토세 공항에 내려 북해도 중심가로 향하는 철도를 타는 순간부터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북해도의 겨울은 일기예보가 필요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날씨를 자랑하는데, 대개 12월의 초입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이듬해 4월이 훨씬 지나서야 모두 녹는다. 북해도에 내리는 눈은 입자가 곱고 금방 쌓여버리기 때문에, 이 5개월 동안 소복소복 쌓인 눈으로 인해 겨울의 북해도 곳곳은 그야말로 동면에 접어든 동화 속 마을로 탈바꿈하게 된다. 기차의 외벽에 굳게 얼어있는 고드름과, 사람들을 따라 지하철 플랫폼 안까지 들어온 눈덩이들, 거리 곳곳에서 사람 키만큼 쌓인 눈을 치우고 그 눈으로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들을 보며 북해도의 길고도 아름다운 겨울을 상상했다.
북해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오타루’였다. 북해도의 중심가인 삿포로 시내에서도 가까운 항구마을 오타루는, 지역주민들의 노력을 통해 메이지 시대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는 모습의 ‘오타루 운하’로 유명한 북해도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바로 이 오타루에서 <러브레터>가 촬영되었고, 실제로 <러브레터>의 발자취를 따라 오타루를 여행하는 관광객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영화 속 주요 건물들은 몇 년 전 화재로 손실되었거나 관공서로 바뀌는 등 지금은 그 모습을 찾기가 조금 어려워졌지만, 오타루는 <러브레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아름답게 느껴질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였다. 오타루는 대부분의 지역을 걸어서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고, 오타루 시내를 관통하는 운하 주변으로 약 100년에 달하는 건물들이 보존되어있기 때문에,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과 함께 근대와 현대의 일본을 비교하는 독특한 체험 또한 할 수 있었다.
마을 대부분을 걸어 다니며 구경할 수 있을 만큼 아기자기한 마을인 오타루의 중심가에는, 1900년대 초반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주 오래된 역사의 오르골당이 있었다. 눈보라를 헤치고 도착한 오르골당의 문을 여는 순간 아름다운 멜로디의 오르골들이 일제히 반짝이며 인사를 건넸고, 눈이 가득하게 내린 거리를 등지고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숨어있었다는 것에 잠시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의 황홀함을 느꼈다. 오타루의 오르골당은 처음 건축되던 시기의 외관과 내관을 거의 손대지 않고 작은 수리와 복원을 하는 정도로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제작된 수 천 가지의 오르골뿐만 아니라 오르골과 오타루의 역사 또한 박물관처럼 전시되고 있어서, 잠시 바깥세상을 잊고 오르골이 들려주는 감미로운 음악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북해도의 중심지 삿포로에서 약 세 시간 정도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비에이는, 여름철이면 라벤더와 튤립 등을 비롯해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로 만발하는 곳이다. 드넓은 꽃밭 때문에 주로 봄과 여름에 관광객이 많이 찾지만, 정작 비에이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비에이의 진정한 매력은 눈이 가득히 쌓인 겨울에만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겨울이면 온통 눈으로 뒤덮여있는 북해도 내에서, 삿포로에서 비에이로 향하는 구간의 풍경이 유달리 특별할 것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출발했던 나의 생각은, 비에이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거대한 설원으로의 시간여행, 앞도 뒤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하얗디 하얀 눈만으로 가득 채워진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바로 비에이에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에이는 다른 지역보다 고도가 높고 북해도 내에서도 눈이 많이 오기로 손꼽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옷을 여러 겹 겹쳐 입고 방한화를 신는 등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겨울철의 비에이는 오후 4시가 조금 넘으면 금세 어두워지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비에이 투어의 출발점인 비에이역은 작고 아담한 역이지만, 비에이 투어를 위한 택시나 기차 시간 등 다양한 정보가 한글로 적혀 있어 매우 편리하다. 비에이역에서부터 시작해 겨울철 내내 꽃씨들이 잠을 자고 있을 거대한 평원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면, 머리까지 쌓여있는 눈, 그리고 눈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나무들과 함께 ‘자연’으로 동화되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고운 모래가루처럼 머리와 옷에 소복이 쌓였다가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마는 하얀 눈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추위를 잊게 해 줄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비에이의 외곽에는 일본에서 가장 빨리 겨울이 찾아온다는 대설산(다이세츠잔)이 자리 잡고 있는데, 맑은 날이면 멀리 비에이의 초입에서도 대설산의 웅장한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내가 비에이를 들른 날은 비에이뿐만 아니라 삿포로에서도 기록적인 눈이 내렸던 날이었기 때문에 대설산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대신 대설산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노천탕에 몸과 마음을 담그고 온천을 즐겼다. 따듯한 온천에 앉아 머리 위로 가득 쌓이는 눈을 털어내고 있으니 설산의 신선이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겨울철 눈이 가득 내리면 부지런히 자신의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고 따듯한 음식을 나눠먹는 북해도의 주민들을 바라보며, ‘눈의 요정’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무릎을 훌쩍 넘기도록 쌓인 눈을 밟고 다니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추운 줄 몰랐던 이유는, 그만큼 북해도의 겨울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비현실적인 풍경을 한 아름 안고 있던 북해도의 겨울은, 매 순간순간 낭만이 넘쳤다.